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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의 북송 견디고…北~南으로 이어온 요리인생 40년[주성하의 북에서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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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회 작성일 24-11-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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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북 강원도를 떠나, 남 강원도에 뿌리내리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강원도 원주 시내에서 금강산막국수 식당을 운영하는 이순복 대표는 1966년 북한의 최남단인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명승지 금강산 자락에 마을이 자리한 경치 좋은 곳이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마음대로 놀려 다니지 못했다. 한국 간첩들이 들어와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어려서부터 귀가 빠지도록 들은 선전 탓이다. 부모들도 어둠이 내리면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출입문 위에는 커다란 나무 몽둥이에 뾰족한 대못을 잔뜩 박은 ‘고슴도치 방망이’가 늘 걸려있었다. 수상한 사람이 오면 내려치라고 당국이 의무적으로 걸게 한 것이다.

이 씨가 8살 되던 때 부모들은 끝내 고성을 떠났다. 6남매를 늘 불안에 떨면서 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계공장 노동자였던 이 씨의 부친은 같은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로 이주했다. 고성에서 나서 자린 이 씨는 고산에 가서 어마어마하게 큰 차가 있고, 기차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곳에서 그는 인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1983년 17세의 나이로 중학교를 졸업하자 국가가 임명한 직장은 보건부 산하 요양소였다.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 특권계층을 위한 요양소

설봉리는 고려 말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인연을 맺은 석왕사가 위치한 경치 좋은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곳 골짜기를 따라 사회 및 군부 요양소만 11개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요양소에 배치되는 일은 큰 특혜였다. 이 씨의 동창 중에선 인물, 체격을 보고 3명만 선발됐다. 요양소는 여성에게 접대원과 요리사라는 두 개의 선택지를 주고 고르게 했다. 그는 요리사를 선택했고, 함북 김책에 있는 6개월 과정의 요리학원에 보내졌다.

그가 근무한 요양소는 중앙당 고위 간부들이 가족과 함께 놀려오는 특별과와 회사에서 일을 잘한 일반 근로자들이 포상 형식으로 선발돼 오는 일반과로 나뉘어 있었다. 입소자들은 한 달 동안 요양소에서 쉴 수 있는데, 특별과와 일반과의 인원 비중은 8 대 2 정도였다.

특별과와 일반과는 숙소와 식당부터 달랐다. 특별과는 매일 고기와 생선 등 12가지 반찬이 제공됐다. 반면 일반과는 반찬이 염장무, 염장양배추, 염장오이 등 ‘염장 삼형제’ 뿐이었다. 항상 말로는 평등한 사회주의를 외쳤지만 어디서든 평등은 없었다.

특별과와 일반과 사람들이 평등하게 먹는 것은 위장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는 약수뿐이었다. 요양을 하는 시늉을 내느라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입소자들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체크까지 하면서 약수를 마시게 했다.

이 씨는 이곳에서 7년을 일하다가 23살 때인 1989년에 군인 병원 화식장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양소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입당을 하려면 군 계통에서 일해야 한다며 등을 떠밀어 선택한 것이었다.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 이루지 못한 사랑

새로 일하게 된 곳은 군단급인 806훈련소 64호 병원이었다. 병원엔 영양실조 환자가 많이 왔다. 이 씨는 그곳에서 1998년까지 9년 동안 근무했다.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시기엔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이 끊임없이 이송돼 왔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식사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기름을 한 숟가락씩 부은 밥에다 조리한 두부 정도였다.

영양실조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한 군인도 많이 왔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엔 인근에서 금강산발전소 갱도 작업이 진행됐다. 열악한 환경이라 사고가 한번 터지면 많이 다쳤다. 한꺼번에 사고를 당한 40~50명이 실려 왔던 날도 있었다.

화식장은 밑에 6명의 조리사를 통솔하는 위치였다. 군 병원에서 일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가 직장을 바꿀 때 뒤를 봐주겠다던 정치부장은 물러나면서 뒷배도 사라졌다.

그 때 이 씨는 병원 노무자로 일하면서 입당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란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수십 년을 일했어도 노동당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다.

견딜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당시 그는 17세 때 요리학원에서 만났던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각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왔다. 그런데 노동당원인 어머니는 죽어도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상대 남성이 귀국자 출신이어서 결혼하는 순간 출신성분이 하락한다는 게 이유였다.

결혼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 이 씨는 나이만 계속 먹었다. 어느덧 북한에선 결혼을 하기 힘들다는 나이인 33세가 되자 그는 폭발했다. 어느 날 병원에 나가지 않고 집을 뛰쳐나가 함북 청진에 있는 언니에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때가 1998년이었다.

하지만 언니 집이라도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외지에서 젊은 여성이 왔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집에 이 핑계, 저 핑계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슬슬 생겨났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다 중국에 시집가. 거기 가면 풍족하게 살 수 있어”라고 바람을 넣는 할머니도 있었고, “결심만 내리면 바로 중국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하는 젊은 여성도 있었다. 젊은 여성을 중국에 팔면 돈이 생기는 시절이라 집을 나온 이 씨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씨가 도망쳐 온 이유를 묻기 위해 언니가 강원도로 부모를 찾아갔다. 속이 상한 부모들은 “그 애는 내놓은 자식이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로 언니를 되돌려보냈다.

이 씨는 반발심이 생겼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니네 집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발을 붙일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중국행을 결심했다. 중국에 사촌오빠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 가짜 공안에 속아 끌려가

1998년 10월 이 씨는 두 여성과 함께 두만강을 넘었다. 그들을 인솔해 간 브로커가 경비대를 매수했기에 대낮에 강을 어렵지 않게 건넜다.

강을 건너자마자 중국 사람이 마중 나와 그들을 싣고 화룡으로 들어갔다. 중국에서 잡히지 않고 살려면 중국 남성을 만나 같이 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도 이런 일을 이미 각오하고 온 터였다.

이 씨의 짝은 연길 인근 조양촌이란 곳에 사는 남자로 정해졌다. 이 씨보다 한 살 어린 농부였다. 가난한 형편에도 결혼하겠다고 3000위안이라는 큰 돈을 내고 그를 데려갔다.

그럭저럭 중국에 잘 정착하나 싶었지만 반년쯤 지나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날 저녁 갑자기 집 앞에 차 두 대가 나타나더니 사내 여섯이 내렸다. 이중 세 명은 공안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에 들이닥쳐 이 씨의 남편에게 족쇄를 채우고, 이 씨는 차에 태웠다. 남편에겐 벌금 수천 위안을 들고 오면 이 씨를 석방하겠다고 했다.

이들이 떠난 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남편은 마을에 있던 중국 공안에 신고했다. 마침 주변에 있던 공안차가 즉각 두 대를 추격해 이 씨가 탔던 차를 막아섰다. 사내들은 이 씨를 팔았던 브로커 일당이었다. 북한 여성을 팔아 돈을 챙기고 몇 달 뒤 공안원을 가장해 여자를 데리고 가서 다시 팔아치우려 했던 것이다. 중국 공안에 체포된 사내 일당은 6년 형을 받고 감옥으로 보내졌다.

중국 공안들은 이 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3일 뒤 중국 공안들은 차를 끌고 다시 나타나 그를 체포한 뒤 북송 조치를 내렸다.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 반 년 만에 끌려간 북한

1999년 6월 그는 다시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송된 탈북민이 거치는 보위부 조사, 단련대, 청진 농포집결소 생활이 이어졌다. 집결소에 들어가니 처음 청진에 왔을 때 봤던 일이 떠올랐다. 시장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40~50명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언니는 이들이 중국에 갔다 잡혀 북송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당시 이 씨는 그들에게 배신자라며 욕을 했다. 1년 뒤 자신이 똑같은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농포집결소에서 약 보름 정도 있었을 때 강원도 고산안전부에서 이들을 이송하기 위해 안전원이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고 운이 좋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고향에서 인계인수를 받으려 안전원이 오지 않아 집결소에서 몇 달씩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냥 수감돼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키기 때문에 몇 달만 지나면 영양실조 환자가 된다.

고산까지 끌려간 이 씨는 안전부 유치장에 구금됐다. 북송된 사람들은 거주지까지 호송돼 거기서 재판을 받은 뒤 교화소에 갈지 단련대로 갈지가 결정된다.

행운이 찾아왔다. 마침 고산안전부가 건물 공사를 하고 있어 임시 유치장을 사용했는데, 살창 간격이 넓었다. 몇 달 동안 조사를 받으며 뼈밖에 남지 않은 이 씨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함께 수감됐던 여성 두 명과 함께 그는 도망쳤다.

유치장을 탈출한 이 씨는 집에 들리지도 않고 다시 함경도로 향했다. 이번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한밤 중에 무작정 두만강에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물이 깊어 키를 넘었다. 놀라서 다시 기슭으로 돌아오다 국경경비대에 걸린 것이다.

보위부 조사-단련대-농포집결소-고산안전부으로 이어지는 이송 과정이 다시 반복됐다. 고산까지 갔는데 배가 많이 불러왔다. 처음 체포돼 북송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몰랐다. 가혹한 환경이지만 배 속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고산안전부에선 만삭에 가까운 그를 차마 잡아둘 수 없었던지 집에 가서 아이를 낳고 오라고 내보냈다.

가석방되자마자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이번엔 브로커를 끼고 무사히 강을 넘었다. 그때가 1999년 11월 말이었다.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 네 번째 북송을 피해 한국행

이때부터 이 씨는 밤에 잘 때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 밤에 공안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한 조치였다. 오전에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넘기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것만이 당시로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다.

2000년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아들이 돌도 되기 전인 이듬해 봄 그는 또다시 체포됐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이라 공안이 오지 않을 것으로 방심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는데, 그날 공안이 들이닥쳤다.

세 번째 북송이었다. 이번엔 북송될 때 돈을 몸 속 여기저기 감추고 끌려갔다. 보위부 조사-단련대-농포집결소까지 다시 같은 코스를 밟아 이송이 진행됐다. 하지만 돈을 가져간 덕분에 고산안전부까진 끌려가지 않았다. 숨겨둔 돈을 호송 안전원에게 건네자 그는 도망을 가라고 눈치까지 주었다.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이름 모를 역에 내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에 돌아오니 촌 정부에서 아이까지 낳고 정착해 사는 여성을 세 번이나 북송한 것은 지나친 처사라며 앞으론 공안이 잡아가지 못하게 막아주겠다고 했다. 그는 이후 중국돈 500위안을 촌 정부에 바치고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2007년 다시 연길에 탈북자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 와중에 체포된 탈북민 중에 이 씨를 잘 아는 여인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 씨가 한국으로 가는 탈북민 10여 명을 지원해준 사실을 털어놨다.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이 씨에게 귀빨리 도망가라고 했다.

중국에 사는 동안 이 씨는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익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도 있었다. 다만 아이가 아파 움직일 수가 없어 참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정성스런 간호를 받은 아이는 건강이 좋아졌다.

네 번째 북송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남편도 사정을 이해한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에겐 병원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나중에 들으니 그가 떠난 지 일주일 뒤에 공안이 집에 들이닥쳤다고 했다.

그가 향한 곳은 몽골이었다. 일행은 모두 9명이었다. 엄청 높은 국경 철조망을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넘어서 한참을 갔다. 그러다 다시 철조망이 만나게 돼 살펴보니 그들이 넘었던 동일한 철조망이었다. 사막에선 자칫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11시간을 사막에서 헤매던 끝에 일행은 마침내 몽골 군인들에게 발견됐다.

군인들을 이들을 땅굴에 가뒀다. 이곳에서 노린내 나는 양고기만 먹으며 보름을 버틴 끝에 마침내 울란바토르로 옮겨졌다.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 5년 만에 달성한 개업의 꿈

이 씨는 2007년 8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당시는 조사 기간도 길지 않아 2007년 11월 하나원을 퇴소해 사회에 나올 수 있었다. 사회에 나올 때 그는 정착지를 강원도로 정했다. 북에서 살던 곳이니 왠지 정감이 갔다. 강원도 원주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고성에 가서 살고 싶었지만, 막상 가보니 원주가 살기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는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5년 안에 자신의 식당을 차리겠다고 결심했다. 북한에서 요리사로 16년을 살다보니 식당을 열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식당을 열 돈이 없으니 우선은 일하며 돈도 벌고 한국의 요식업계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정착 열흘 뒤부터 그는 식당에 취직해 열심히 일했다. 어떤 음식점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이 강원도를 대표하는 음식인 막국수였다. 그때부터 그는 막국수 식당들만 찾아다니며 취직해 열심히 일했다.

일하다보니 “탈북민에겐 월급을 적게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장도 만나게 됐고, 퇴직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사장도 있었지만, 목표가 있으니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5년 동안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마침내 8000만 원이 모였다. 그 돈을 밑천으로 삼아 2013년 1월 원주 시내에 ‘금강산막국수’라는 상호를 내건 식당을 열 수 있었다. 5년 안에 내 식당을 열겠다는 목표를 이룬 것이다.

돈이 없다보니 주차장도 없는 가게를 얻게 됐고, 인맥도 없어 한계가 명백했지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시작한 식당은 어느새 11년째를 맞았다. 두 달 뒤면 개업 12년째를 맞게 됐다.

그 오랜 기간 금강산막국수는 하루도 문을 닫은 날이 없었다. 하루 휴식도 아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국에서 축구선수로 성장했던 아들도 가끔 한국에 와 어머니의 식당일을 거들어준다.

강원도의 많은 막국수집들은 겨울에 손님이 없어 문을 닫는 곳도 많다. 이 씨는 백숙과 닭볶음탕, 북한식 어복쟁반, 두부전골 등으로 메뉴를 다양하게 만들어 막국수 비수기에 대비했다. 이제는 막국수보단 다른 메뉴가 훨씬 더 많이 팔린다. 치열한 노력으로 그는 신규 식당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치열한 요식업의 세계에서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았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그는 강원도 대표 식당으로 선수촌에 자원해 들어갔다가 한달 보름 만에 엄청난 적자를 보게 됐다. 그 적자를 다 갚게 돼 숨을 좀 돌리러나 했는데 이번엔 코로나가 터졌다. 그렇지만 코로나 기간에 적자를 보진 않았고, 자영업자들에게 지급되는 지원금도 받지 않았다. 7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단골손님을 많이 만들어놓은 덕분이었다.

북에서 온 이웃/ 일요일 출고/ 금강산막국수 이순복 대표




● “금강산에 식당을 열겁니다.”

식당이 자리 잡고 나자 이 씨는 지역사회 봉사에도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7년 동안 사회복지관이나 경로당에 매년 TV와 냉장고와 같은 전자제품을 기증하고, 해마다 한 번씩 노인들을 대상으로 잔치도 연다.

“북한에 살 때 요양원에서 일한 추억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복지관을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봉사하면서 알게 된 인연들이 한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이 씨의 봉사의 범위는 점차 넓어져 복지관과 경로당뿐만 아니라 고아원과 국가유공자들에게도 무료 음식을 수시로 제공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봉사다.

“능력이 되면 인근 시골에 별장을 하나 사고 싶습니다. 이곳을 탈북민들이 힘들면 와서 쉴 수 있는 쉼터처럼 꾸려놓을 겁니다. 북에선 온 사람들은 명절에 얼마나 외롭습니까. 이럴 때 함께 모여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정말 좋지요.”

이 씨는 북한에서 32년을 살았고, 중국에서 10년을 살았으며, 한국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다시 고향에 식당을 여는 것이다.

“열여덟에 요리사가 돼 벌써 40년째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 음식도 만들어보고, 중국 음식도 해보고, 한국 음식도 다 해봤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요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힘이 남아있을 때 통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통일이 되면 금강산막국수 식당을 진짜로 제 고향 금강산 자락으로 옮겨가고 싶습니다. 금강산막국수는 금강산에 있어야죠. 그곳은 한국의 요리를 북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식당이 될 것이고, 남북의 요리를 하나로 통합하는 식당이 될 것입니다.”

꿈을 말할 때 이 씨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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