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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이 바꾼 세계사…숨기고 싶은 ‘진실’
인도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로 수많은 작품을 통해 제국주의를 비판해온 아미타브 고시가 이번에는 ‘아편’에 주목했다. ‘양귀비’라는 작은 식물을 통해 식민지 지배자인 서구 열강의 악덕과 탐욕을 파고든 논픽션 에세이를 펴냈다. 제국주의의 폐해를 꼬집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 피지배 국가의 존재감과 행위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고통받고 있는 그들의 명예 회복에 앞장선다.
이번 책은 저자의 여행기이자 회고록이며, 수십 년간 고문서 연구를 기반으로 한 역사 에세이다. 저자는 아편 무역이 영국, 인도, 중국 그리고 세계 전반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추적한다. 아편 무역에 앞장선 대영제국은 자국의 거대한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인도 아편을 중국에 수출했다.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기 위한 비용을 충당한 것이 바로 아편 밀거래다. 아편 밀거래로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에 대해 깊이 파고들던 저자는 아편이 세계 최대 기업 중 일부, 특히 미국의 가장 강력한 가문과 아이비리그, 그리고 글로벌리즘 기원의 핵심이었음을 확인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아편의 역사적 주체성’에도 주목해볼 만하다. “아편은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식으로 인간 사회와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저만의 독특한 능력을 키웠다”는 설명. 지금은 향정신성 물질, 즉 ‘마약’ 이미지가 강하지만 해당 목적을 위해 인류가 양귀비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고작 수백 년밖에 안 됐다. 씹거나 불을 붙여 피우면 곧바로 쓸 수 있는 대마초 등 다른 식물과 달리, 덜 익은 양귀비 열매 유액을 아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상당한 가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편은 단순 물질이 아닌, 지난 3~4세기 동안 활약한 일종의 ‘생물학적 제국주의 행위 주체’로 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책은 영국·미국을 비롯해 그 무역으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챙긴 세력의 불의와 위선을 까발리는 비판서이자 폭로물이다. 아편 공급으로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은, 나아가 아편 부작용의 원인이 스스로의 유약함이나 체질적 한계라고 몰아세워지며 여전히 문화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식민지 피지배자를 다독이는 위로문이기도 하다.
[나건웅 기자 na.kunwoo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3호 2024.11.06~2024.11.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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