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기온에 과수 치명상
지난 25일 오전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33년째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노진수씨가 꽃눈이 달린 나무 가지를 잡고 곳곳을 살펴보고 있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지금 꽃눈이 움직이기 시작해. 자 봐봐 파란 거 보이지. 이게 조금 있으면 열리기 시작할 거야. 작년보단 많이 달려서 다행이지.”
봄 시작을 알리는 춘분20일이 막 지난 25일.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33년째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노진수씨가 사과나무 가지를 조심스레 만지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백두대간을 낀 농가 고지는 약 350m. 8000평 가까이 되는 농가는 탁 트여 아랫동네보다 시원한 바람이 와닿았다. 노씨는 새콤달콤한 맛이 특징인 ‘감홍’과 ‘부사후지’ 등을 재배하고 있다. 그는 명품 사과의 고장이란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매일 이른 새벽부터 농가를 둘러보고 있다. 메마른 가지를 뚫고 기적처럼 돋아나던 꽃눈을 한참 바라보더니 작년 꽃샘추위에 얼어 죽어 누렇게 말라붙은 꽃눈을 회상했다.
지난 25일 오전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33년째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노진수씨가 나무가지 끝 부분에 맺힌 꽃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꽃눈 암술 씨방이 검게 변하며 서서히 죽는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사과는 영하 3도 정도 저온을 한 시간쯤 버틸 수 있다. 그 이상 길어지면 암술이 갈변돼 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만큼 예민한 과일인 셈이다. 그는 “이맘때였나 냉해 피해 때문에 꽃눈이 얼어 죽었어. 비도 많이 와서 힘들었지. 태풍 맞으면서 타격이 있었어. 사과 크기도 작았고 착과 개수도 줄었다”며 “올해는 최대한 날씨를 믿어봐야지 않겠냐”며 허탈한 표정으로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밭 한 가운데에는 높은 기둥 위에 날개를 부착한 방상팬이 돌아가고 있었다. 더운 공기를 아래로 불어내려 냉해 피해를 예방한다. 다만, 방상팬 가동에 지출하는 난방비는 기존보다 2배 이상 올라 걱정이 크다고 했다. 노씨는 “비룟값, 인건비 등을 비롯해 난방비까지 오른 마당이라 어려움이 다들 클 것”이라며 “면세유 지급이 불가한 점이 얼마나 불합리하냐”고 성토했다.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된 이상기후로 사과를 비롯한 과일 가격이 가파르게 치솟은 부분에 대해선 유통구조를 문제점으로 꼽았다. 노씨는 “농사꾼들은 유통과정을 거쳐 마트나 백화점에 넘겼던 사과 가격보다 2~3배 뛴 값에 판매되는 모습을 보면 말이 안 되지 않냐”며 “사실상 농가 소득은 재작년이나 전년 둘 다 비슷한 수준이고 우리가 돈을 많이 번다는 거랑은 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5일 오후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전인식씨. 40년이 넘은 사과 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사과 농가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1978년도에 전前 농장주가 심었던 사과 묘목은 40년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로 변해있었다. 현 농장주인 전인식씨는 10여 년 전부터 과수원을 임대받아 운영 중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년에 3~4번씩 일본에 방문해 농사법을 배워왔다.
전씨는 작년 한 해를 되돌아보며 “작년에 비 억수로 왔다 아이가. 우리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다른 데 들어보면 못 파는 사과가 천지삐까리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꽃눈도 제대로 생기지 않아 아쉬움이 컸고 올해는 관리를 더 잘해야 하지 않겠냐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전인식씨가 지난해 수확했던 사과 한 박스. 작년 문경명품사과품평회에 출품해 대상을 차지한 후지 사과.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무서운 기후위기…사과 농가 덮친 ‘탄저·폭우·냉해’
다음 날인 지난 26일 충북 보은군 상승면을 찾았다. 1만5000평가량의 사과 농가를 운영하는 이명희씨. 올해로 40년째 사과 농장을 경영하는 베테랑 농부다.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작년 이맘때 꽃눈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보면 다 새카맣게 죽었잖아. 보통 5개 송이가 나오는데 여기 보면 3개가 얼었잖아. 다 상했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한몫한 셈이다. 특히 지난해 사과 수확량이 크게 줄어든 데에는 봄철의 이상기온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2023년 3월 전국 평균기온은 9.4℃로 1973년 기상관측 이래 최고온도를 기록했다. 평년보다도 3.3℃가 높았다.
충북 보은군 상승면 일원에서 40년째 사과 농장을 경영하는 이명희씨가 지난해 29일 촬영한 꽃눈 사진. 자세히 보면 꽃눈이 냉해 피해를 입어 검게 변해있다. ⓒ이명희씨 제공
따듯해진 날씨에 일찍 기지개를 켠 사과꽃이 냉해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꽃눈도 평년에 비해 열흘 이상 빨리 피었다. 이씨는 착잡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꽃 피는 시기가 빨라졌어요. 보통 4월 말, 5월 초에 폈던 것이 거의 한 달 가까이 앞당겨 진거여.”
사과는 고온다습한 환경에 취약하다. 고온기와 장마 등에 힘없이 무너지는 탄저병은 보은에도 찾아왔다. 과실 표면에 까만 점이 생기면서 점차 움푹 파이며 썩어가는 병이다. 특히 여름철 강우기가 길어지면서 한반도에서 탄저병은 번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는 “내가 오전에 우리 농가들 만났는데 탄저병 걸린 사과를 매몰한 과수원에 들어가면 지금도 시큼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며 “사과 농사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농민도 있고 자연재해로 인정되지 않아 피해가 크다”고 한탄했다. 현재 농작물 재해보험으로 피해가 인정되려면 자연재해가 입증돼야 한다. 자연재해대책법상 자연재해는 태풍·홍수·호우·강풍 등으로 발생하는 재해로 돼 있어 구제받을 수 없다.
지난 26일 오후 충북 보은군 상승면 일원에서 40년째 사과 농장을 경영하는 이명희씨가 가지치기를 마친 사과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 등에 따르면 사과나무는 통상적으로 5년 정도 자라야 정상수준인 200개 정도의 사과가 열린다. 그만큼 사람 손이 많이 가는 농사다. 병해충 등을 막기 위해선 농약도 주기적으로 뿌려야 한다. 이씨도 작년에만 20번 가까이 농약을 살포했다. 여름철 잦은 비로 농약이 씻겨 내려가 더욱 약을 친 것이다.
사과값 증가세는 올해 햇과일 사과가 나는 추석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과의 경우 조생종인 츠가루아오리가 7월 말 정도부터 출하되는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4개월간 가격 안정화는 어려운 셈이다. 가격 폭등 배경에는 유통과정이 복잡한 요인도 적지 않다.
그는 “유통 종사자들이 너무 많이 때는 건 사실”이라며 “우리가 한 5000~6000원대 명품 사과를 백화점에 납품할 때 보면 소비자한테 판매하는 가격을 1만원에서 1만5000원 사이 받잖아. 두 배는 먹고 들어가는 거잖냐. 이런 사실 알면 농민들은 너무 허탈하다고.”
2100년엔 ‘강원도 사과’만…“이상기후 대비해야”
사과 재배면적도 점차 줄어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사과 재배면적은 2023년까지 8.6% 감소해 여의도290㏊ 10배에 달하는 재배지가 사라진다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은 전망했다. 지난해 농촌진흥청은 2100년에는 사과가 강원도 일부에서만 재배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상기후는 사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배 생산량도 전년보다 26.8% 감소했다. 작년 봄철 피해와 여름철 잦은 호우 등이 피해 원인으로 지목됐다. 농진청에 따르면 배는 2050년부터 줄어들다가 2090년대에 산지가 강원도로 모인다. 복숭아와 포도도 2090년엔 대폭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부는 가격이 급등한 과일과 채소 등 먹거리 물가 안정을 위해 수입 과일 관세율을 한시적으로 낮추고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부 대책이 농가에 악영향으로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는 “수입을 늘리게 되면 장기적으로 국내 과일 시장에 타격을 줄 수 있어 국내 과일 소비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이상기후에도 버틸 수 있는 품종 개량과 기계화 등을 통해 농가 보호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경·보은=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maengho@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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