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혐오 정치, 과학 부정론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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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과학의 시대다. 정치는 경제적 번영과 국익을 위해 과학의 이름으로 국민을 설득한다. 하지만 정략적 목적을 위해 과학을 부정하는 흐름도 공공연하다. 트럼프는 기후위기 같은 객관적 현상도 ‘역대 최악의 사기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가 기후와 에너지를 책임지는 에너지장관으로 임명한 크리스 라이트는 석유회사 경영자이자 공공연한 기후위기 부정론자다.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이자 과학자들 대다수가 합의한 객관적 현실도 외면하는 것이 과학부정론이다. 과학부정론이 자기 신념에 부합하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는 탈진실 현상과 만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할 경우, 공론장이 무너지고 공동체의 존립이 흔들릴 수 있다.
기후위기 부정론
한때 트통령트위터 대통령으로 불렸던 트럼프는 2021년 대선 불복 이후 여러 소셜미디어에서 퇴출됐다가 지난 8월 일론 머스크가 인수한 엑스구 트위터로 복귀했다. 친환경 전기차를 생산하는 기업의 소유주 머스크와 나눈 대담에서 트럼프는 “화석연료 사용을 억제할 시급성이 별로 없다”며 기후위기를 부정한 바 있다. 기후변화는 인간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적 변화이며,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약화하려는 중국의 사기극이라는 게 트럼프의 일관된 주장이다. 집권 시절엔 지구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기준 2℃ 이내로 제한하자는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한 바 있다.
과학은 정치인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에 합의할 때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오늘날 과학으로 간주되는 것은 과학계와 공론장에서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것들이다. 과학의 힘은 완벽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과학적 진실 속에 내재하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며, 기존 이론의 오류를 보여주는 증거가 나올 때 기꺼이 인정하는 열린 태도에서 나온다.
하지만 과학부정론자들은 과학이 100% 완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작은 의혹을 빌미 삼아 그동안 이룬 과학적 성과 전체를 부정한다. 1950년대 흡연과 폐암의 연관성 이슈가 대두하자 기존의 과학적 성과에 대한 의심을 유포하는 일에 거액을 뿌린 담배회사가 그랬고, 1990년대 석유회사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 이처럼 과학부정론은 태생부터 기업의 이익과 관련이 깊다.
객관적 현실은 존재한다
2024년 대선 직전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82명은 트럼프가 당선되면 과학과 기술 및 기후변화 대응 분야 발전이 저해될 것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인 2017년에는 보스턴의 과학자들이 집회를 열어 “객관적 현실은 존재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과학을 보호하고 미국을 다시 현명하게 만들자”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확산한 반과학주의, 반지성주의, 혐오주의의 폐해에 과학자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신작 ‘넥서스’에서 과학혁명은 무지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됐으며, 과학은 제도적 협력에 의존해왔다고 말한다.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급진적 경험주의’는 얼핏 과학적 태도처럼 보이지만, 정당·법원·언론·대학 등 사회를 떠받치는 제도들이 보이지 않는 협업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셈이다. 100% 확실한 것만이 과학이라는 태도와 급진적 경험주의가 만날 때, 전문가들이 합의한 과학적 진실은 거부되고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탈진실’로 빠진다. 탈진실 현상을 연구해온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과학부정론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유리한 증거만 수집하고 불리한 증거는 무시하는 ‘체리피킹’, 증거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이론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 가짜 전문가 의존하기 등”을 제시하면서 “객관적 현실이 아닌 믿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확증편향은 강화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고 탈진실 태도에 빠지는 이유로 리 매킨타이어는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자기 인생이 망가진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음모론을 접할 때 자신이 ‘진실을 아는 소수’에 속한다는 소속감·신념·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인지과학자 스테판 레반도프스키는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다수의 전문가가 합의한 과학적 이슈조차 신념의 문제로 변하며, 공교롭게도 과학부정론자의 대다수가 보수주의 정치 성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탈진실 정치 시대
탈진실 정치 시대를 연 트럼프는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는 ‘가짜뉴스’라고 몰아붙였고 심지어 명백한 과학적 사실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논란이 많은 이슈로 만들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소셜미디어인 셈이다.
트럼프는 2016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소셜미디어 이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경쟁자를 고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플랫폼에서 논쟁하는 능력을 갖추면서 상대보다 더 많은 힘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상대를 공격하고 음모론을 퍼트릴 때 소셜미디어를 이용했다. 2021년 소셜미디어에서 퇴출된 이후에는 직접 ‘트루스소셜이라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반면 트럼프를 꺾고 2021년 대통령에 취임한 바이든은 ‘과학과 진실’을 기치로 내세웠다.
유발 하라리는 “보수는 기존 제도와 전통을 지키려 하고, 진보는 더 나은 사회구조를 설계하기 위해 기존 제도를 고치려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기존의 보수와 달리 사회적 합의와 객관적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사회의 존립기반 자체를 흔들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축적된 규칙·제도·관습의 그물망을 통해 작동한다. 반면 기존 제도를 파괴하고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는 트럼프의 정치는 ‘보수의 자폭’을 넘어 사회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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