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서 가장 부조리한 시험 수능…공정의 대가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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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3루에서 태어나,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착각한다.”
- 베리 스위쳐1937~ -
새벽 풍경에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콧속을 살짝 얼리는 공기를 호흡하며 잔뜩 웅크린 아이들이 낯선 학교로 모여든다. 시끌벅적한 응원을 뒤로하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과 단절된다. 이제부터 홀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부모의 망막에는 자식의 긴장한 뒷모습이 잔상으로 박힌다. 부모의 시간은 그 순간으로 정지되고, 자식이 실수하지 않고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두길 기도한다. 땅거미가 질 무렵 교문 앞에 선 부모는 쏟아져 나오는 무리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기 위해 목을 빼 든다. 그리고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쿵 떨어진다. 모든 부모의 염원은 평등하지만 아이들은 한 줄로 서야만 한다. 일등이 나오려면 꼴등도 있어야 한다. 오십만의 수험생이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문제를 같이 보는 수능은 거대한 공정의 무대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시험 시간은 칼 같이 지켜진다. 관공서의 출근도 늦춰지고, 영어 듣기 평가를 위해 비행기 이착륙과 지상 접근도 금지된다. 하지만 공정의 대가로 수능은 세상에서 가장 부조리한 시험이 되었다.
건달도 눈치 보게 한다는 고3 부모를 경험해야, 수능이 입시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나절만에 측정된 12년 노력의 결과는 얼마 후면 각자에게 통보될 것이다. 그럼 이를 바탕으로 불꽃이 튀는 전략 싸움이 시작된다. 학력고사 세대의 눈치작전은 딱지치기 수준이다. 특히 올해는 수능의 킬러문항 배제 원칙으로, 최상위권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한다. 수험생들은 가채점으로 자기 점수는 이미 알고 있다. 만약 한 문제라도 틀렸다면, 정시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있는 서울대 의예과 합격은 보장되지 않는다.
대학이 선발에 이용하는 점수는 원점수라 불리는 학생의 개인 점수가 아니라 표준점수라 불리는 상대 점수다. 이는 과목별로 한 줄로 세웠을 때 원점수의 순서와 분포로 계산된다. 같은 백점이라도 다른 사람도 잘 봤으면 상대 점수는 낮아지고, 다른 사람은 못 봤으면 상대 점수는 높아진다.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도 재수 없으면 실패하는 불합리를 품고 있는 것이 수능의 상대 평가다. 소위 올백을 받아도, 선택 과목에 따라 결과에 떨어지는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대한민국 입시 제도는 수험생 엄마가 제일 잘 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 아이를 대신해 엄마가 전략을 대신 고민해야 할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크게 수시와 정시로 구분되는 전형도 다양하고, 학교마다 적용되는 입시 요강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예비고사에서 수능까지 입시를 관통하는 본질은 줄 세우기다. 그리고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한 선발 방식이다. 과거 학력고사와 유사한 수능 한 줄서기 입시가 정시다. 동점이 있으면 면접, 과목, 내신, 안되면 나이까지 따져서 줄을 세운다. 공정성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입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공정은 더욱 중요한 원칙으로 부각된다.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한 ‘공정 경쟁’
공정은 평등이나 공평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원시시대 집단 사냥을 예로 들어보자. 누구에게나 사냥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공평이다. 그리고 참여한 모두가 동일하게 고기를 나누는 것이 평등이다. 공정은 사냥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고기를 불평등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즉 공평은 기회의 동등, 평등은 결과의 동등, 그리고 공정은 공평한 기회와 규칙에 근거한 불평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규칙은 집단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명확한 기준을 의미한다. 경쟁이 없으면 공정할 필요가 없다. 경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공정에서는 규칙이 가장 중요하다. 공개 채용에서 인맥으로 면접에 합격하는 경우는 ‘불공정한 공평’이다. ‘공정한 공평’의 대명사가 수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적 공정에 매몰이 되면서 모든 학생이 불행한 교육을 받도록 강제하는 부조리한 시험이 되었다. 공정한 경쟁의 본질은 타인의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을 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조리absurdity의 철학적 개념은 이유가 없음이다. 합리적 세상이라면 선한 사람이 잘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부조리다. 동서를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봉건제 국가는 강력한 신분제가 사회 지배원리였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내가 멸시받으며 죽도록 일해야 한다면, 내 자식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부조리를 지속시키려면 환기 장치가 필요하다. 사람은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묻지마 살인에 더욱 분노하는 것도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상업문화 기반의 서양에서는 종교가 신분제의 환기장치였다. 하지만 농경문화 기반의 동양에서는 종교가 발달하지 않았고, 대신 과거 제도가 부조리의 환기 장치로 이용되었다.
국가시험에 대한 과잉 집착은 동양 문화권의 유서 깊은 공통현상이다. 과거 제도는 중국 수나라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능력 위주의 관료 선발 제도였지만, 실상은 귀족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제도였다. 내가 혹은 자식이 불행한 이유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합리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주관해서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수능은 모두가 익숙하지만 모두가 관심 없는 특이한 사회문제다.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발언권이 없고, 발언권이 있는 어른은 관심이 없다. 학생들이 느낀 부조리는 대입에 성공하면 행복한 추억이 되고, 실패하면 자책 속에 상처로 덮히게 된다. 아픈 상처를 들춰보는 것은 누구나 싫어한다. 조선 시대 2000:1의 경쟁률에 육박하는 과거 제도가 오백년간 지속 가능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양날의 검과도 같은 시험
대한민국에서 수능은 12년의 공부를 겨루는 경쟁이다. 인생이 결정된다는 팽팽한 긴장 속에 국어 시간이 시작된다. 어려운 문제를 마주치면 동공이 확장된다. 모르는 문제가 늘어날수록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은 쿵쿵거리고, 호흡은 빨라진다. 그러다 이성의 통제 역치를 넘어서면,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공포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두뇌는 수능이라는 현실의 시공간을 벗어나, 포식자를 피해 먹이를 구하던 태고의 시공간으로 회귀한다. 두뇌의 감정 영역이 진화하던 시절 낯선 상황, 낯선 장소, 낯선 냄새와 소리는 공포의 방아쇠였다. 낯선 대상의 정체가 사나운 포식자라면 도망쳐야 살 수 있고, 먹이라면 사냥해야 굶어 죽지 않았다. ‘사냥이냐 도망이냐’의 판단 실패는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수많은 멸종의 위기를 극복하며 진화한 인간의 두뇌에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다. 두뇌의 감정 영역에서 모르는 문제는 불확실성으로 받아들여지며, 역치가 넘으면 교감신경을 자극하여 공황 반응을 촉발한다.
시험은 문명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지식 탐구의 즐거움은 취미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원시의 초보 사냥꾼이 직접 시행착오를 통해 두뇌를 학습시켰다면, 현대 학생은 책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 학습한다. 그리고 목숨을 건 사냥 대신 시험을 통해 주어진 상황에서 지식과 판단 능력을 검증한다. 문명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지만, 두뇌의 생물학적 진화 관점에서 수천년 문명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본능과 이성을 중재하는 감정 영역은 시험과 사냥 상황을 구분하지 못한다. 역치를 넘은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두뇌의 연결 구조는 원시나 현대나 동일하다. 시험 결과가 치명적일수록 공포에 빠지기 쉽다. 결과를 무시하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시험 공포증의 치료다. 결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아이의 경우, 시험 문제를 아예 읽지 않는다. 두뇌는 불확실성에 노출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부에 익숙한 학생들은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시험까지 준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모르는 문제가 일으키는 불확실성에 대한 혐오 때문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일수록 시험 범위를 벗어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처럼 시험은 성실성, 지식 축적, 이성적 판단 능력, 감정의 통제력 등 다양한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다. 잘 사용하면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치명적 부작용을 일으킨다.
수능은 왜 부조리한 시험이 됐나
수능이 부조리한 시험이 된 일차적 책임은 대학에 있다. 수능의 설계 목적에서 벗어나 입시에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능은 장원급제를 뽑는 과거 시험이 아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이라는 이름대로 수능은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으로 도입되었다. 능력 검증이란 준비가 부족한 사람을 걸러내는 음성 선택negative selection을 의미한다. 너무 구간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수시 전형에서 수능 등급을 최저학력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이 설계 목적에 부합한 활용이다. 하지만 정시는 줄을 세워 일등부터 뽑는 양성 선택positive selection이다. 이를 위해 수능 결과를 표준 점수로 환산해 선발한다. 과학적으로 수능에서 같은 등급 구간의 능력 차이는 오차 범위 안이다. 따라서 점수를 기준으로 줄을 세우는 것은 수능의 오남용이다. 불수능이니 물수능이니 킬러 문제니, 표준점수 몇점 차이로 재수, 삼수를 하는 것은 평가 공학의 측면에서 부조리의 극치다. 더 심각한 것은 제비뽑기나 다름없는 결과로 발생하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의 소모가 합리화된다는 것이다.
수능의 부조리에는 과도한 학력 인플레이션도 있다. 학력은 절대평가와 상대평가로 측정된다. 그리고 도입 의도라면 수능은 절대평가로 다뤄져야 한다. 절대평가는 자기 점수가, 상대평가는 상대 점수가 중요하다. 현재 수능에서는 영어만 절대평가고, 나머지 과목은 모두 상대평가로 활용된다. 영어에서는 원점수가 90점 넘으면 무조건 1등급이다. 하지만 국어, 수학, 탐구는 점수가 아니라 순위가 4%에 들어야 1등급이다. 상대평가인 등급과 표준점수를 잘 받으려면, 자기만 잘하고 다른 사람은 못해야 한다. 경쟁원리 측면에서 보면 상대평가가 공정하다. 하지만 상대평가는 각자도생 경쟁을 유발한다. 한 번의 상대평가 결과를 보면 합리적이라는 착시가 일어난다. 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상대평가 결과를 연 단위로 비교하면 부조리가 드러난다. 지금 단군 이래 최대라는 수험생 학력 수준은 매년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물가나 부동산도 아닌 학력에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중이다. 아이들의 공부 부담이 매년 늘어나는 이유는 복잡한 것이 아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은 양극화다. 학력 격차로 인해 공부를 포기하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진다.
공정 경쟁에서 합리적 경쟁으로
수능의 가장 큰 부조리는 공교육을 개미지옥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학에는 평가하지 않을 것은 가르치지 말라는 금언이 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은 공부하지 않는 학생의 습성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소위 인기 대학의 정원은 정해져 있고, 이를 위한 줄서기의 문지기로 수능이 버티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교육 공급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교육 소비자의 관심이 수능에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수능처럼 객관식 문제로만 채워진 대규모 표준화 시험은 한계가 명확하다. 객관식으로 측정하기 적합한 영역은 과학이고, 상극인 영역은 인문학이다. 과학 문제는 정답이 명확하지만, 인문학 문제는 오지선다의 답가지로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기 어렵다. 국어에 ‘매력적인 오답’이니 하는 이상한 용어가 튀어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와 타인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측정하려면 서술형 주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채점의 공정성 시비로 주관식은 퇴출당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인문학적 소양에 교육 소비자가 관심을 가지길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꿈이다.
첨단 인공지능인 o1-프리뷰 대규모 언어 모델이 올해 수능 국어에서 한 문제만 틀려 1등급을 받았다. 과목에 상관없이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수능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물론 알파고가 있다고 바둑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올백을 맞는다고 수능이 사라질 일은 없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지금 수능에서 측정하고 있는 학생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수능에서 측정하는 모든 영역에서 인공지능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지금까지 아이들의 대뇌 피질 기능만 열심히 발달시켜 왔다는 방증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능의 공정성에 매몰되어 소시오패스sociopath를 양산하는 교육을 해 온 셈이다.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면서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미래의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과학이라는 불변의 지식도 필요하지만, 인문학을 통해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인문학은 문명의 기반이 된 학문의 뿌리로, 교육 영역에서 인문학의 소멸은 우리 사회의 인간성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생태계 관점에서는 승자독식, 적자생존의 서열화는 문제가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불멸자인 유전자가 진화하기 위해, 필멸자인 생물의 목숨을 걸고 각자도생의 경쟁을 시킨다. 문명에서도 집단 내 경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사람은 원시 밀림 속 원숭이도 아니고, 시험관 속 대장균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판검사나 의사인 집단은 존재할 수 없다. 문명이 자연을 압도한 이유는 경쟁의 다변화를 통해 다양한 능력의 발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회 발전과 집단 고도화에 필요한 것은 획일적 점수가 아니라 가치의 다양성을 규칙으로 하는 합리적 경쟁이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수능의 부조리를 직시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교육 붕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철현 |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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