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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가 묻는다, 과학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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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9회 작성일 23-09-0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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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가 묻는다, 과학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가 핵실험 성공 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르고 있다. [유니버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려낸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인생은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이상 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단 하나의 방정식을 찾아내려는 과학자들의 시도를 닮았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삶을 마치 입자이자 파동인 빛, 혹은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모순에 가득 찬 ‘현상’으로 묘사한다. 어쩌면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에서의 물질처럼 관측자의 관측에 따라 상태가 확정되는 ‘확률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관객의 입장에 따라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일 수도, ‘수소폭탄의 반대자’일 수도 있다. 노조 활동을 지지하며 공산당과 연루됐던 좌파일 수도 있고, 조국 미국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졌던 애국자일 수도 있다. 사랑을 위해 매일 꽃을 들었던 로맨티시스트일 수도 있고, 자식과 가정에 충실했던 가족주의자일 수도 있다. 금수저를 문 천재로 태어나 가난한 자, 못 배운 자를 깔보기 일쑤였던 오만한 사내였을 수도 있고, 약자와 인류의 생존을 고민했던 지식인일 수도 있다. 독일을 증오했던 유대인일 수도 있고, 전쟁을 끝내려 했던 평화주의자일 수도 있다. 권력을 탐했던 정치적 야심가일 수도 있고, 학문적 진리만을 좇았던 양심적인 과학자일 수도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미국7월 21일과 한국8월 15일에서 개봉한 이후 6일까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에선 개봉 이후 흥행 순위 1위를 이어가며 5일까지 누적 관객 280만명을 넘어섰고, 미국에선 3일까지 3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올해 흥행 순위 5위에 랭크됐다. 양국을 포함한 전 세계 흥행 수입은 8억5298만달러약 1조1255억원에 달한다.

특히 국내 관객에겐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뿐 아니라 한국의 식민지 해방의 계기가 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 가장 뜨거운 정치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대응에서도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오펜하이머의 공산당 연루 의혹과 노조 지지활동에 대한 미국 정치계에서의 논쟁이다. 항일 독립영웅인가, 소련에 협력한 공산주의자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논란의 구도는 오펜하이머의 행적을 둘러싼 미국 내 쟁점과 겹친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심판’은 전쟁을 종식시킨 미국의 영웅인가, 국익에 반해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이적행위자였나를 두고 벌어졌다. 아울러 ‘과학적 사실 혹은 과학적 연구는 과연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은 과연 가능할까.

모든 걸 다 가지려 했던 남자,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껴안으려 했던 과학자

부모와 10대 자녀가 함께 보면 불편할 수 있는 장면인 ‘15세 관람가’ 속 ‘19금 장면’이 관객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사랑과 결혼을 비중 있게 묘사한다. 물론 연인이었던 진 태틀록과 부인 키티 오펜하이머가 공산당 활동 경력이 있었고, 이것이 오펜하이머의 소련 스파이 혐의와 기밀정보 접근권을 두고 열렸던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AEC의 비공개 청문회에서 중요한 증거로 다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상 더 흥미로운 것은 ‘오펜하이머의 여인’들이 가졌던 이념보다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태도다. 오펜하이머는 두 여인을 통해 사랑과 결혼 모두를 가지려 했다. 육체적 욕망, 정신적 만족, 안정된 가정, 행복한 가족을 모두 누리려 했다.

어쩌면 ‘수학적 해’가 모순될 수밖에 없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문제를 자신의 삶이라는 하나의 방정식으로 풀려고 했던 것처럼 오펜하이머는 학문적 진리와 정치적 권력, 과학적 야심과 윤리적 명분을 모두 감당하려 했다. 그는 진리를 향한 순수한 탐구자이고자 했으나 대중적으로 각광받는 영웅의 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양심적인 지식인인 동시에 과학계의 권력자, 정치적인 유력 인사이고자 했다. 인류적 이상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이면서 미국의 애국시민임을 증명하려 했다. 공동체의 책무와 인류적 이상을 좇으면서도 부와 명예 등 세속적 욕망을 누리고자 했다.

그는 과학의 원죄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사제의 성의와 술·음악이 넘치는 파티 주인공의 화려한 드레스를 동시에 걸치고자 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려 했던 남자이고,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껴안으려 했던 과학자였다. 그러나 사랑과 결혼, 과학과 정치로 지어진 오펜하이머의 신전엔 반드시 제물이 바쳐져야 했다.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무고한 인명들이 끔찍하게 살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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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쿠르트 괴델. [소소한책 제공]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나눴던 ‘정치적 대화’ 그리고 앨런 튜링의 비운의 죽음

영화에는 오펜하이머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놀란 감독이 창작한 허구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잠깐이지만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핵분열처럼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영화의 주제가 상징적으로 담기는 장면이기도 하다.

극 중 오펜하이머는 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 루이스 스트로스 초청으로 방문한 프린스턴대학 교정에서 쿠르트 괴델과 함께 산책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괴델은 ‘불완전성의 정리’로 유명한 수학자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1933년에, 괴델은 1940년에 프린스턴으로 가서 위 아래층으로 붙어 있던 연구실을 배정받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걸었다. ‘상대성 이론’과 ‘불완전성의 정리’로 각각 물리학과 수학사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던 세기의 두 천재, 아인슈타인과 괴델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미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저널리스트인 짐 홀트의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에는 그 일단이 담겨 있다. 당연히 두 사람의 독보적인 이론뿐 아니라 물리학과 수학의 전반, 특히 우주와 시간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정치도 이야기의 주제였다. 짐 홀트에 따르면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아인슈타인은 매카시즘반공주의에 적극 반대했던 진보적인 민주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지지했다. 아인슈타인은 괴델이 공화당 후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표를 던지자 격분했다고 한다.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그리고 ‘함께 길을 걷는 아인슈타인과 괴델’을 한 장면에 불러모은 것은 매우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선택이었다. 스트로스는 실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상무장관으로 지명됐고, 장관 후보자로서 그의 의회 청문회는 영화의 3가지 이야기 축 중 하나다. 오펜하이머의 대학 시절부터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까지의 과정이 이야기의 첫 번째 축이고, 두 번째는 오펜하이머가 미 원자력위원회에서 받는 비공개청문회다.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연인과 부인을 포함해 미국 공산당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한때 대학 노조 설립을 지지·선동했던 경력으로 인해 미국의 핵폭탄 개발정보를 소련에 넘겨줬다는 의혹을 사며 미국 정치권에서 매카시즘에 공격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자라는 의혹을 완전히 벗은 것은 최근 일이다.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해 12월 오펜하이머의 보안 접근권한과 관련한 1954년의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1967년 오펜하이머가 사망한 지 55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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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게임’에서 주인공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이 영국군에게 체포되는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과학자라고 한다면 또 한 명의 천재인 앨런 튜링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역시 조국 영국에 헌신한 전쟁영웅이었지만 개인사로 인해 사실상 ‘대역죄인’으로 몰려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였으며, ‘튜링 머신’이라는 컴퓨터의 원조 격 기계를 발명한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조국의 요청을 받고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비밀작전을 주도해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세계대전 종식을 앞당겨 1400만명을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전후엔 당시 영국에선 불법이었던 동성애 혐의로 체포돼 모든 기밀업무에서 제외됐고 화학적 거세형을 받았다. 그리고 1954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튜링의 삶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 잘 담겼다.

튜링은 사후 69년이 2013년에서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의해 사면·복권됐다. 영국 정부는 2021년 50파운드 지폐에 튜링의 초상을 새김으로써 그의 공을 기렸다.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미국의 원폭 투하...정의란 무엇인가

“대통령 각하,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와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담긴 그대로 오펜하이머가 1945년 10월 25일 백악관에서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에게 던진 말이다.

무슨 뜻일까. 그는 과연 핵폭탄의 개발을 후회했을까. 인류 절멸의 무기를 만들어낸 책임감으로 수소 소폭탄을 반대했을까. 과학계에서의 명성과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야심 때문이었을까.

영화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정치, 개인의 욕망과 공적인 사명 사이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갖가지 갈래의 드라마를 그려낸다. 그리고 관객은 최종적으로 모든 질문의 해를 만족시켜야 하는 단 하나의 물음을 맞닥뜨린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전쟁이 계속됐다면 희생됐을 수많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듯하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던졌던 유명한 ‘기찻길 딜레마기차는 멈출 수 없고 오로지 둘 중 한 궤도만 선택할 수 있으며, 한쪽엔 한 사람, 다른 쪽엔 여러 사람이 있다’를 빌리자면 이것은 단지 ‘공리주의적 답변’일 뿐이니까 말이다. 미래에 희생될 수도 있는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더 적은 사람’을 희생시킨다? 그것도 전쟁에 책임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수만, 수십만명 말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과학이 ‘과학적 사실’로도, ‘과학적 연구’로도, 과학자 개인의 삶으로도, 과학자들이 구성원인 하나의 사회로도 결코 정치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 같다. 사실 과학이야말로 창조론과 진화론이 갈라지고 천동설과 지동설이 투쟁했던 ‘태초’부터 단 한 번도 정치의 영토를 떠난 적이 없지 않았는가. 가깝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기후 변화, 원자력발전 그리고 후쿠시마 오염수를 둘러싸고 서로 ‘과학적 사실’이라고 싸우는 무수한 ‘정치적 주장’이 말해주듯 말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과학의 정치 중립은 가능한가’가 아니라 ‘과학은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로 말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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