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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북아에 평화의 물결이 일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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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4-09-09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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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경 중앙대 독일유럽학과 박사과정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마지막 주, 여러 나라의 청년들이 서울에 모였다. 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가 주최하는 ‘2024 동북아 여름 평화학교이하 평화학교’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평화학교는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 동북아 지역의 평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장이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세계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이 지역에서 과연 평화체제가 구현될 수 있을까?

한국의 중앙대, 일본의 도쿄대, 중국의 베이징대이들 대학은 독일학술교류처가 선정, 지원하는 아시아의 3대 ‘독일유럽연구센터’가 있는 곳이다 석박사 과정 학생을 중심으로, 독일, 네덜란드, 이스라엘, 칠레, 브라질 등 8개국 40여명의 젊은 예비학자들이 이 질문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이번 평화학교는 다양한 강연과 4개 조로 나누어 이루어진 소그룹 토론과 워크숍, 그리고 비무장지대DMZ와 박물관 탐방 등 문화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평화학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준 높은 강연들이었다. 모든 강연이 내겐 강렬한 지적 자극을 주었다. 독일 오스나브뤼크대 기외르기 첼 교수는 ‘자유와 평화’라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평화의 문제를 단순히 군사적, 정치적 맥락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 강연이었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의 강연 ‘다른 과거, 공동의 미래’도 압권이었다. 한중일 동북아 3국은 각기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생태적, 사회적 파국이라는 동일한 미래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공동의 노력으로 이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대 백승욱 교수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위기에 처한 세계질서’는 듣는 내내 가슴을 졸였던 강연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반도 전쟁의 예고편일 수 있다’, ‘위기는 연결되어 있다’는 경고는 얄타체제 이후 세계질서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세계체계론의 거시적 관점이 결합된 정교한 이론적 분석을 통해 개연성을 높였다.

두이스부르크-에센대학의 한네스 모슬러 교수의 강연도 한반도 정세에 대한 중요한 인식을 일깨워주었다. 동북아의 지극히 복잡한 상황 속에서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국의 외교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해주었다. 한겨레평화연구소 정욱식 소장은 ‘글로벌 시각에서 본 한반도 문제와 해법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는데,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의 진단과 처방은 매우 설득력이 강했다. 특히 북한이 ’질적으로 새로운 나라‘로 변화했다는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남북문제도 이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함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의 강연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한미관계 전문가로서 한반도의 분단과 갈등이 국제 정치, 특히 미·중 대립 속에서 어떤 압력을 받고 있는지 정치하게 분석했다. 중국, 일본, 독일 등에서 온 외국인 학생들은 한미관계의 복잡성과 모순성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북한대학원대학 김선경 교수의 강연 ‘북한 주민의 초국적 이주와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도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적’이었다. 한반도 분단이 개인에게 가한 가없는 고통의 상처를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앞의 강연들이 주로 ‘체제’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이 강연은 결국 문제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점을 환기시켜주었다.

학문적 논의만큼 중요한 것은 문화 프로그램이었다. 참가자들은 DMZ, 역사박물관, 창덕궁, 인사동, 청계천 등을 방문하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했다. 우리의 따뜻한 환대는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을 넘어 평화와 소통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경험은 참가자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평화가 단지 정치적 협상이나 군사적 해결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적인 인간 교류 속에서 자람을 배웠다.

어쩌면 워크숍과 그룹 토론이야말로 평화학교의 백미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각국의 참가자들이 역사적 상처를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이야기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 학생 간의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광복절’이라고 불리는 8·15가 일본에선 ‘종전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한 일본 학생은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고, 자신들이 왜곡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가해자 측면’은 침묵하고 ‘희생자 측면’만 강조하는 잘못된 역사교육 때문이라고 했다. 도쿄대 박사과정에 있는 한 일본 친구는 “우리 일본이 저질렀던 일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고 한글로 쓰인 구글 번역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평화학교는 단순한 학문적 담론의 장만이 아니라 실제로 평화의 토대가 만들어지는 교류와 대화의 장이었다. 동북아 평화는 더 이상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손을 내밀고 대화하고 협력할 때, 현실이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여러 나라의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6박 7일을 함께 보내면서 ‘만남이 기적을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함께 강연을 듣고 토론을 벌이고, 전쟁과 분단의 상흔을 만졌다. 그 모든 순간이 ‘평화’라는 가치로 모였다. 영구평화라는 긴 여정을 위한 지속적인 교류를 약속했다. 이제 겨우 물꼬가 트였다. 고여 있던 동북아 세 나라가 서로 물길을 내어 강에서 뒤섞였고, 그 물결은 온 세계로 이어진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이번 평화학교는 동북아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를 향한 거대한 여정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의 최북단 역인 강원도 철원 월정리에서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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