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관 아들의 죽음, 7년간 싸운 교회 장로 "하늘도 원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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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혔던 채상병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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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100년 같았던 날. 밤이 이렇게 길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해병대 채수근 상병이 별이 된 시간. 꿈 많은 청년의 삶이 마감되고 유족은 통한의 세월이 시작된다. 남은 이가 겪는 아픔을 치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다. 전북CBS는 채상병처럼 자식을 군에서 잃은 유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직접 들었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1860건의 죽음을 기록했다.
▶ 글 싣는 순서 |
①채상병 어머니 편지 "아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②채상병을 그리워하는 이들, 우리 사회에 묻다 ③"예람이 스케치북이 증거잖아요!" 3년간 관사 짐에 있었다 ④윤일병 어머니 "아들 떠나보낸 10년, 군은 바뀌지 않아" ⑤홍일병 어머니 "살릴 기회 3번 있었는데…제가 무능한 부모예요" ⑥군의관 아들의 죽음, 7년간 싸운 장로 "하늘도 원망했어요" 계속 |
2016년 12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군에서 연락이 되지 않으니 전화를 달라는 말이 들렸다. 국군수도병원이었다. 아들 이용민 중위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말. 수술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 전화기에서는 상상도 못 한 말이 흘러나왔다.
영등포에서 분당 국군수도병원으로 혼이 빠진 채 달려갔다. 부디 아무 일이 없기를 환하게 아빠라고 불러주기를 기도했다. 수술을 끝낸 의사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스물아홉 번의 겨울을 난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이득희 씨는 군 검찰의 수사 결과를 몇 개월 뒤 통보받았다. 경기도 포천에서 군의관으로 복무 중인 아들 이용민 중위는 2016년 12월 14일 저녁 노래방 출입구 계단에서 넘어지고 머리를 다쳤다. 곁에 있던 동료 군의관 2명은 출동한 119구급대원에게 "우리가 의사다. 알아서 하겠다"며 응급조치와 후송을 거부했다.
이용민 중위는 인근 군 복지시설로 옮겨진 뒤 이튿날 아침 뇌출혈 증상 의심 진단을 받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2017년 1월 3일 뇌사판정을 받고 사망했다.
"제 아들 얼굴은 완전히 피가 많이 묻었고 눈도 많이 부어 있고 파랗게 또 숙소 내에는 핏자국이 굉장히 많았고 제 아들을 3시간을 방치했습니다."
당시 군은 이용민 중위가 개인적인 휴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순직처리를 하지 않았다. 이용민 중위는 외상성 경막상 출혈이라는 진단을 받고 두개감압술 수술을 받았다. 학계에서 경막상 출혈은 의식이 있는 경우 사망률은 0% 또는 0.8%에 해당하는데 경막상 출혈에 있어서는 수술 전 의식상태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최초 구급대원이 출동해 망인의 사고를 확인한 시점에서 망인은 의식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 현장 관계자들의 일관된 진술로서 동료 군의관들의 후송거부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 중위는 생존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 상당하다."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기록
위원회의 순직 요청에도 국방부는 기각을 결정했다. 일과 시간 외에 벌어진 일에는 국가책임도 없고 순직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게 군의 설명이었다. 여기서부터 기나긴 국가에 대한 투쟁이 시작됐다. 군은 변호사를 내세웠지만 득희 씨는 혼자였다.
"군의관들이 우리가 의사이니 알아서 하겠다라고 하면서 현장에 출동한 앰뷸런스를 돌려보냈어요. 가장 큰 잘못이죠. 결론적으로 군의관들은 과실치사와 군의료법 위반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았어요."
고 이용민 중위와 아버지. 유족 제공
1심과 2심에서 국가의 책임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군은 잔인했다. 유족을 상대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득희 씨의 손을 들었다. 순직이 이뤄진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슬픔과 고통 속에 울었던 유족들의 시간도 돌아오지 않는다. 내 한쪽이 사라진 허전함만 돌아왔다.
"하루 24시간을 군에서 책임을 져야지 책임을 안 지는 거예요. 진짜 저같이 7년 동안 울고 있고 지금도 울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최소한 이런다고 해서 제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 순직 좀 해준다고 그래서 우리 제 아들이 다시 돌아가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국가에서 최소한의 예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군은 올해 4월에서야 이용민 중위의 순직을 결정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만이다. 아버지 득희 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7년이라는 시간을 국가와 싸웠다. 개인 생활도 없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했지만 5차례 보류되고 아무 결론을 얻지 못했다.
고 이용민 중위 사진과 어머니가 쓴 엽서. 김현주 뉴미디어 크리에이터
지금도 아버지는 텔레비전 화면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희로애락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아들은 군 임시보관소에 임시 안치하며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용민 중위 어머니는 밤에는 눈물로 엽서를 쓰고 아침이면 아들 주위를 맴돌다 돌아왔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용민아, 엄마 아빠 왔어. 온 세상에 눈이 와서 온통 하얀데 모든 것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 아들만 안 보이네. 우리 용민이만 안 보이네. 잘 있지. 그곳에서 편안히 잘 있지. 눈물도 아프고 없는 그곳에서 잘 있지. 나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많이 보고 싶어. 어떡하면 좋니 너는 왜 대답이 없니…"엽서의 한 대목
이용민 중위 사진. 유족 제공
이용민 중위는 똑똑한 아들이었다. 특목고와 연세대 의과대학을 나왔다. 공부도 잘했지만 부모 속 한 번 썩이지 않았다. 훌륭한 의사를 꿈꾸던 아들을 군에 보내고 혼수상태로 마주한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하루 단 두 번뿐인 면회가 유일한 삶의 끈이었다.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침 10시에 10분 보고, 저녁 6시에 또 10분 보고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렇게 병원생활을 20일간 했습니다. 제가 교회 장로입니다. 지금도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왜 내가 이걸 당해야 합니까. 저 아들 하나입니다. 지금은 제 아들이 하나님 곁에서 잘 있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아들을 보내는 일도 가족의 몫이었다. 아들의 장기와 뼈는 새 생명에 기증됐다. 의사가 되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겠다던 아들의 꿈. 죽어서 대신 이루게 된 아버지는 가슴을 쳤다. 지난 7월 5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 중위 이용민1988~2017의 봉안식이 거행됐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이득희 씨는 아들을 잃은 충격에 발길을 끊었던 고향을 이제야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북CBS 기획 [묻혔던 채상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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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CBS 남승현 기자 nsh@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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