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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는 심리전용 종이 폭탄…폭탄 투하를 민간에 맡겨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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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82회 작성일 24-06-0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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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6일 새벽 대북전단 20만장을 경기도 포천에서 추가로 살포했다고 밝혔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제공

남북이 대남 오물 풍선과 대북 전단을 두고 날카롭게 맞서고 있다. 북한은 지난 2일 밤 대남 오물 풍선 살포를 잠정 중단하고 앞으로 대북 전단이 날아올 경우 백배로 되갚아주겠다고 밝혔다. 남북이 풍선과 ‘말 대포’를 주고받다 무력 충돌로 번질 것이란 불안이 커지고 있다.



대북 전단 문제가 한반도를 위기로 몰고 갈 도화선으로 등장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일부 탈북민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표현의 자유 보장” 차원에서 “자제 요청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9월 대북전단 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며 내린 위헌 결정 취지를 존중한다는 설명이다.




윤석열 정부는 전단삐라을 ‘표현의 수단’으로 여기지만, 원래 ‘전쟁의 수단’이다. 삐라는 20세기 이후 심리전의 대표적인 수단이 됐다. 삐라는 계산서나 전단지 등을 뜻하는 영어 ‘빌’bill의 일본어 발음 ‘비라’びら 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전방지역 북한군의 귀순을 종용하는 1960·70년대 대북 전단. 강원도 디엠제트DMZ 박물관

남북은 분단 이후 ‘심리전’의 일환으로 대남전단과 대북전단을 날려 보냈다. 한국전쟁은 ‘삐라 전쟁’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장관인 프랭크 페이스는 “적을 종이로 묻어라”고 지시했고, 미 국무부는 “적군과 시민에게 매일 삐라 한장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공산당 관리는 환락에 취해있고 북한 백성들은 고통받고 있다고 묘사한 한국전쟁 때 대북전단. 강원도 디엠제트DMZ 박물관

“적을 종이로 묻으라”는 말은 ”적을 삐라로 묻으라”는 뜻이었다. 미군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 기간 전후방에 40억장의 삐라를 뿌렸다. 40억장은 지구 열여섯 바퀴, 한반도를 서른두 번 덮을 양이다. 북한군도 3억장의 삐라를 뿌린 것으로 추산한다. 최전선에 눈처럼 뿌려진 삐라는 병사들의 무릎까지 차올랐다고 한다.



미국이 한국전쟁 때 삐라를 뿌린 것은 2차 세계대전 경험 때문이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 전선에서 80억장의 삐라를 뿌렸다. 미국이 삐라를 많이 뿌린 것은 20세기에는 전쟁의 형태가 국가의 모든 능력을 쏟아붓는 ‘총력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총력전에서는 전방과 후방의 구분, 전시와 평시의 구분이 없다. 총력전에서는 적의 전쟁 수행 의지 자체를 말살시켜야 이길 수 있어, 인간의 심리를 자극해 원하는 방향으로 적의 행동을 유도하는 심리전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2차대전·한국전쟁 때 미국은 군사조직을 갖추고 작전 형태로 삐라를 살포했다.



젊은 여성 사진과 함께 북한군의 귀순을 종용하는 문구를 담은 1980년대 대북전단. 최명길을 비롯해 당시 톱스타였던 정윤희·안소영·이경진·이미숙·이혜숙·황신혜 등이 삐라에 단골로 등장했다. 강원도 디엠제트DMZ 박물관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됐지만, 남북의 삐라전쟁은 계속됐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투는 끝나도 상대의 생각과도 싸우는 심리전은 계속됐다. 남북은 서로 삐라를 뿌려 상대 체제를 깎아내리고 자기 체제를 자랑했다. 한국의 삐라는 주로 북한 최고지도자를 겨냥했다. 1950년대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소련과 중국에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비판했다. 70년대 이후에는 북한이 권력을 세습하고 북한 최고 지도자의 사생활이 문란하다고 공격하는 삐라가 많았다. 8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자랑하는 내용이 많아졌다. 북한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 찬양, 반미 선동 등의 내용을 담은 삐라를 날려 보냈다.



냉전 때 삐라 살포는 유럽에서도 이뤄졌다. 미국 정부는 1951~56년 소련 위성국가인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에 3억장 이상의 전단을 실은 35만개의 풍선을 보내, 동유럽 주민들의 마음을 소련에서 멀어지게 만들려고 애썼다. 미국은 냉전 때 쿠바·니카라과 등에서도 ‘풍선 작전’을 벌였다.



1990년대 냉전이 끝나고 1990년 남북총리급 회담이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삐라 문제가 수그러들었다. 남북은 2004년 6월 군사분계선 일대 방송, 게시물, 전단 등을 통한 모든 선전 활동 중지에 합의해 심리전 활동이 중단됐다. 군 등 남북 당국이 주도하던 삐라 살포는 공식 중단했다. 이후 남북관계가 나빠지면 남북 양쪽이 삐라를 일정 기간 뿌리곤 했다.



북한이 지난 2016년 대남풍선에 매달아 보낸 오물과 전단. 합동참모본부 제공

2000년대 중반부터 남쪽에선 탈북민 단체, 북한 인권운동 단체 등이 북한으로 삐라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후 남북회담에서 북한은 탈북민의 삐라 살포가 남북 합의 위반이라고 압박했고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특성상 민간단체 활동을 막을 수는 없으나 최대한 설득하고 있다고 맞섰다.



심리전은 소리 없는 전쟁이다. 2차대전 때 미국이 체득한 심리전의 원칙 중 하나가 ‘심리전은 사령부의 기능’이다. 냉전 때 삐라는 아무나 뿌리는 게 아니라, ‘사령부’인 국가가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내용의 전단을 유포할지 치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해 뿌려왔다.



원래 삐라는 심리전을 수행하는 수단이다. 남북관계에서 삐라는 ‘종이 폭탄 구실을 해왔다. 폭탄 같은 무기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가 독점하는 게 원칙이듯이 삐라 또한 그래야 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탈북민들이 삐라 살포는 남북 분단에서 비롯된 한반도만의 특성이다.



윤석열 정부가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표현의 자유’라고 뒷짐을 지는 것은 전쟁 수행 수단의 집행을 민간에 맡기고 방치하는 셈이다. 국군통수권자인 윤석열 대통령이 삐라가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라 오래된 ‘전쟁 수단’이란 점을 되새겨봤으면 좋겠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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