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년 함께했던 세 나라, 이제 한국이 주도할 수 있다는 근거는?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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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 ⑧] 같아서 반갑고 달라서 신기한... 한중일 3국 문화코드 글 : 한재혁 전 주광저우 총영사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지난 5월 19일 중국 다롄大連시에서는 아카시아 꽃 축제가 한창인 가운데 우리 김해시에서 온 매화무용단의 춤 공연과 사물놀이 풍물패의 흥겨운 선율이 울려 퍼지며 다롄시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앞서 4월에는 중국의 전통 그림자극을 비롯한 한중일 3국의 문화공연이 김해시의 무대에서 함께 선보였다. 2024년 동아시아 문화도시 개막식이 각각 한국과 중국에서 개최된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도시는 2012년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합의된 후 2014년부터 매년 국가별로 도시 한 곳씩을 선정하여 다채로운 문화예술 교류 행사를 연중행사로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우리나라의 김해시, 일본의 이시카와현, 중국의 다롄시와 웨이팡#x6ff0;坊시가 선정되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광주, 청주, 제주, 대구, 전주 등이, 중국에서는 취안저우泉州, 칭다오靑島, 닝보寧波, 청두成都, 메이저우梅州 등이 선정된 바 있다. 2021년부터는 중국은 신청 도시들 숫자가 많아 2개씩 선정하고 있다. 다롄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부성장급副省長級 도시이자 아름답고 깨끗한 항구도시로 유명하다. 과거 고구려의 비사성이 위치했던 지역이다. 청일전쟁 중 1894년 일본군이 침략했고 전쟁 후에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제에 할양되었다. 1898년에는 러시아가 조차하여 다르니로 명명했고,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서쪽의 부동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러일전쟁 후 1905년 일본이 조차권을 가져가면서 다롄이라고 불렀다. 2차 세계대전 말기 1945년에는 소련이 점거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 1951년에는 뤼순旅順시를 합병하였고 1981년 다시 다롄시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 우리 귀에 익숙한 여순감옥旅順監獄이 있고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열사들이 조국을 위해 투쟁하고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여순감옥은 당초 러시아에 의해 1902년 세워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이어받아 규모를 확장했고, 1939년에는 여순형무소로 개칭했다. 중국인과 조선인 외 많은 외국인을 가두고 탄압한 장소였다. 1945년 소련이 진군하여 관리하다가 신중국 성립 후 중국이 이어받아 복원하여 1971년부터 외부에 개방하고 있다. 다롄은 1984년 중앙정부가 연해 개방도시沿海開放城市로 지정하면서 빠른 발전을 이루어냈다. 인구 700만 명 규모이며 중국 내에서는 축구의 도시足球之城이자 낭만의 도시浪漫之都, 교육의 도시이자 관광의 도시로 유명하다. 유난히 광장廣場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우리 영사사무소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또 다른 2024 동아시아 문화도시인 웨이팡#x6ff0;坊시는 산동성에 위치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칭다오靑島와 웨이하이威海의 서쪽에 붙어있는 인구 900여만 명의 도시이다, 고대에 중국을 일컫던 지우저우九州 중의 하나인 칭저우靑州로 불렸다. 지금의 이름은 강 이름 웨이허#x6ff0;河에서 왔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이東夷 문화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과거 남소주, 북유현南蘇州北#x6ff0;縣이라 불리며 남쪽 지역의 쑤저우와 더불어 북방의 상공업을 대표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모옌莫言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붉은 수수밭紅高粱에서 느낄 수 있는 질박하면서도 강렬한 민족 정서情緖와 향토 풍정風情이 배양된 곳이자 수많은 그의 작품에 직간접적 배경이 되었다. 작년 말에는 모옌 문학관莫言文學藝術館이 붉은 수수밭 문학기지紅高粱文學基地라는 별칭과 함께 웨이팡 가오미高密에 설립되었다. 웨이팡은 중국에서 펑쩡風箏이라고 불리는 연鳶으로도 유명하다. 노魯나라 때 철학자 묵적墨翟이 일찍이 나무 연을 3년 걸려 만들어 하루 날리고 말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청淸나라 때 서화가 이자 문학가였던 정판교鄭板橋는 53세에 당시 유현#x6ff0;縣으로 불리던 웨이팡에 현령縣令으로 와서 7년간 선정을 펼친다. 유현을 추억하며懷#x6ff0;縣라는 시에서 당시 연 날리는 풍광을 "종이꽃이 눈발처럼 하늘 가득 날린다紙花如雪滿天飛"고 묘사했다. 또 직을 떠나며 쓴 시罷官作에서는 20여 년간의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한가로이 종이 연을 날릴 것閑逐兒童放紙鳶"이라고 심경을 표현했다. 판교 정섭鄭燮은 유현 현령을 하면서 자신의 대표작인 유현죽지사#x6ff0;縣竹枝詞 40수를 썼다. 중국에서 그는 또한 난더후투難得糊塗란 처세의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똑똑하기는 어렵다. 어리숙하기는 더 어렵다. 똑똑했다 어리숙해지기는 매우 어렵다.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마음을 편히 갖고, 바라지 않으면 후에 돌아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聰明難, 糊塗尤難, 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 放一着, 退一步, 當下安心, 非圖後來報也." 웨이팡 시내에는 연 광장風箏廣場이 있고, 매년 세계 연날리기 대회도 개최된다. 전 세계 연의 70%를 생산한다. 웨이팡이 연의 도시鳶都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이다, 연은 한중일 3국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전통문화코드이다. 붓글씨 쓰기를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로,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으로,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로 부른다. 같은 것을 추구하지만 예술로써, 방법으로써, 수련으로써 그 방점을 각기 달리 두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중일 3국간에는 연뿐 아니라 수천 년간 교류를 통해 많은 풍습과 사상이 공유되고 축적되어 왔다. 매화, 대나무, 소나무, 젓가락 등 공통된 문화코드도 많다. 우리에게서는 난초蘭草로 불리지만 중국에서는 난화蘭花가 익숙하다. 각기 같음에 반가워하고, 다름에 신기해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 구동존이求同存異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인/기/기/사 ◆ "쉬는 거 맞나? 돌아가보자"…아내 눈썰미가 시민 살렸다 ◆ 전봇대 뽑히고 번쩍…사고 낸 운전자 "술 깬 줄 알았는데" ◆ 인증샷 유행에 "이러다 멸종"…한라산에 드론 띄워 막는다 ◆ "바짝 따라오세요" 앞뒤에 경찰이…출근길 뚫고 달린 사연 ◆ "밥풀 다 떼고 버렸는데…즉석밥 용기, 재활용 안된다니" ▶ 네이버에서 S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가장 확실한 SBS 제보 [클릭!] * 제보하기: sbs8news@sbs.co.kr / 02-2113-6000 / 카카오톡 @SBS제보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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