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보복 북진론 와중에 미국서 받은 팬텀기 6대…55년 만에 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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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8월29일 오전 11시 공군 대구기지. 한국 공군의 숙원이던 팬텀기F-4D 인수식이 열렸다. 팬텀 6대는 미 본토 맥클레란 기지를 출발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서 이날 대구기지에 착륙했다. 미국에서 팬텀 비행훈련을 마친 강신구 공군 중령의 지휘로 한국 공군 전투조종사들이 미국에서 한국까지 팬텀을 몰고 왔다. 팬텀기 조종사들은 오키나와에 착륙하여 팬텀기 동체에 대형 태극기를 그린 뒤 대구기지 사열대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태극기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저고도로 진입하여 착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날 인수식 이후 대한민국 영공을 55년간 지켜온 팬텀이 다음달 7일 수원기지에서 퇴역식을 하고 일선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최근 팬텀에 관심이 쏠리면서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보상책으로 미국으로부터 도입됐다는 주장이 관련 기사와 유튜브 등에서 정설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17일 한겨레가 공군에 팬텀 도입 과정과 배경 자료를 요청하자 공군 관계자는 “대구에 있는 제11전투비행단이 발간한 ‘F-4D팬텀 41년사’ 등 관련 자료를 확인해봤는데, 군 내부에서 팬텀 도입 배경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만,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 등 공군 장성 출신 인사들이 자서전에서 팬텀 도입에 대해 밝힌 내용이 있다. 이 가운데 1968년 당시 공군본부 작전국장이었던 권성근 장군의 자서전 내용이 비밀해제된 미국 외교 문서 내용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게 권영근 한국국방개혁연구소장공군 대령 출신의 설명이다. 1968년 1월21일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1·21 사태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에 보복 공격, 작전통제권 환수, 베트남 파병 국군 철수 등을 거론하자 1968년 2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특사로 사이러스 밴스가 방한해 1억 달러 군사 지원을 약속했으며 한국이 이 돈으로 팬텀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팬텀 도입 배경으로는 1960년대 후반 한반도 안보 위기에 주목해야 한다.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이틀 뒤인 1월23일 발생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처리를 두고 한국과 미국이 정면 충돌했다. 1·21 사태 뒤 한국군은 비상경계태세를 갖추고 주한미군사령부에 강력한 군사적 응징조처를 촉구했으나 미국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서는 전군에 전투준비태세 명령을 내리고 항공모함을 동해로 보냈다. 미국이 1968년 2월2일부터 판문점에서 북한과 푸에블로호 송환 비밀 협상을 한 것도 한국을 자극했다. 미국의 이중적 태도에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이 보복공격의 일환으로 북진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박 대통령은 장군들과 저녁을 먹으며 북한 황해도 옹진반도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당황한 미국은 한국군 단독 북진을 막으려고 한국군에 대한 유류 보급을 통제했다. 존슨 미국 대통령은 한국을 달래러 사이러스 밴스 특사를 한국에 파견했다. 1968년 2월12일 5시간30분이나 진행된 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밴스는 대북 보복을 놓고 충돌했다. 박 대통령은 차후 발생할 북한의 도발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군사적 보복 대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밴스는 대북 보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미국이 보복 공격에 반대한 이유는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또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이 주장했던 대북 보복 공격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이었다. 구체적으로 청와대를 습격한 북한군 특수부대 주둔지와 훈련장, 평양 김일성 주석 숙소를 보복 공격하려고 했다. 미국은 이런 보복 공격이 이뤄지면 남북간 전면전으로 번지고 미국이 휩쓸려 들어갈 것을 우려했다. 당시는 냉전 때라 중국과 소련이 개입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봤다. 1967년과 1968년 남북 간 군사 충돌이 빈번해 한반도에서는 거의 전쟁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1967년 4월 육군 7사단 포병대가 북한을 향해 585발의 포격을 가했다. “1968년 한해는 한국전쟁 이후 휴전 기간 중 가장 격렬한 해였으며,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 ‘정전협정과 관련된 중대사건 일지’ 중에서 1968년에는 남쪽으로 침투하던 321명의 북한 무장병력이 사망하고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181건의 남북 충돌이 벌어졌다. 이 결과 145명의 국군, 18명의 미군, 35명의 민간인 등 198명이 전사하고, 240명의 국군, 54명의 미군, 16명의 민간인 등 310명이 다쳤다. 1968년 남북은 이틀에 한번 꼴로 군사분계선에서 교전을 벌였고 한반도는 사실상 전시상태였다. 미국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한국이 평양 김일성 주석 숙소를 공격하면 바로 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될 것으로 봤다. 밴스 특사의 방한은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의 방한에 앞서 미국 정부는 1968년 2월8일 한국에 대한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를 미 의회에 요청했고, 밴스는 이 카드를 들고 왔다. 한국은 이 돈으로 팬텀을 구입했다. 미국은 1·21사태 이전까지는 ‘팬텀을 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팬텀같은 공격용 무기를 한국이 보유하면 북한을 멋대로 공격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1·21사태 이후에는 대북 보복 공격을 고집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무마하려면 더는 그럴 수 없었다. 미국은 한국군 단독의 대북 공격 가능성을 없애려고 위성항법장치GPS 같은 주요 기능을 뺀 팬텀기를 한국 공군에 제공했다고 한다. 결국 1969년 F-4D 팬텀 도입은 당시 일촉즉발의 남북관계, 불평등한 한-미 관계, 미국의 세계전략이 한국 공군력 건설에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례다. 1969년 8월29일 팬텀 인수식에서 김성룡 공군참모총장은 환영사를 통해 “우리 공군이 팬텀기를 갖게 된 것은 그동안 정부가 벌인 군사외교의 결실이며 우리는 이제 세계 막강의 대열에서 긍지로써 영공 방위의 소임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공군은 다양한 팬텀 퇴역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55년전 공군참모총장이 두루뭉술하게 밝힌 ‘군사외교’의 구체적인 내용과 팬텀 도입 배경, 과정 등을 이참에 공식 기록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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