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은 결국 정권 지켜냈다…尹도 李도 필요했던 읍참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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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에 나서는 제갈량. 중국 CCTV 드라마 제갈량의 준비는 치밀했습니다. 촉한의 군사가 한중을 넘었을 때 위魏와 촉의 국경지대에 있던 남안·천수·안정 등 3개 군에서 동시에 제갈량에 호응했고, 장안 등 위나라의 서쪽 국경은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서는 ‘위나라의 조야가 모두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패는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갈렸습니다. 제갈량은 신예 마속에게 요충지 가정街亭에서 위나라 구원군을 막도록 했는데, 마속은 엉뚱하게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가 포위로 고립되면서 대패했습니다.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 제갈량은 결국 북벌을 중단하고 철수합니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습니다. 잘 알려진 ‘읍참마속泣斬馬謖ㆍ울며 마속을 베다’의 유래입니다. 가정 전투. 자료 나무위키 삼국지 시대에서 100여년 뒤인 동진 시대의 역사가 습착치는 “촉한은 원래 약소하고 인재도 드물다. 그런데 뜻밖에도 준걸을 죽였다. 이렇게 사람을 쓰면서도 대업을 이루려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제갈량의 처사를 비판했습니다. 제갈량이라고 그런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벤 데는 복잡한 방정식이 녹아있었습니다. 촉한의 정치를 이끈 3대 그룹과 형주파의 독주 촉한을 정복한 유비, 관우, 장비는 모두 익주 출신이 아니었다. 드라마 ①유비 그룹 도원결의부터 입촉 전까지 합류한 그룹. 제갈량ㆍ관우ㆍ장비ㆍ조운 등 ②유장 그룹 유장 정권에서 일한 익주의 구舊 주류. 법정ㆍ이엄ㆍ동윤 등 ③익주 그룹 익주의 토호-명사 세력. 장익ㆍ마충ㆍ초주 등 유비 그룹에서도 핵심은 형주파였습니다. 유비는 과거 형주를 다스리던 유표에게 의탁한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형주가 전란에서 비껴있던 덕분에 유비처럼 조조를 피해 머물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유비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교우하며 인재 풀을 넓혔습니다. 제갈량과 방통을 비롯해 황충·위연·장완·요화·이엄·등지·비의·양의 등 촉한 정권에서 중용된 주요 인재 다수가 형주 시절 인연입니다. 촉한의 주요 인사 출신지. 형주파가 상대적으로 많다. 토박이인 익주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연고 없는 외부 세력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유비와 장비는 유주幽州, 관우는 사예司隷州, 조운은 기주冀州 출신이고, 이를 떠받치는 것은 제갈량을 필두로 한 형주파입니다. 촉한은 익주益州에 세워졌는데, 주요 자리는 외지인으로 채워진 것이죠. 유비에 앞서 익주를 다스린 유장 그룹도 요직에서 소외된 채 비주류가 됐으니 속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촉한은 출신도 다양하고, 구성도 복잡했습니다. 정권을 유지하려면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비는 창업주이고, 황실 후예라는 혈통과 정치적 카리스마라는 자산이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 자산이 없는 제갈량은 자신이 속한 형주파를 중심으로 일을 꾸려갔습니다. 그 대신 빈틈없는 일 처리와 공정한 법 집행으로 비판을 무마해 나갔습니다. 북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제갈량 북벌은 촉한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어젠다였습니다. 외적 갈등을 유발해 내적 갈등을 막는 방법이죠. 제갈량이 네 차례나 북벌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입니다. 또, 양국의 국력차도 감안해야 했습니다. 위나라가 자리 잡은 중원은 정치, 경제의 핵심입니다. 다만,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동탁, 원소, 여포, 조조, 원술 등이 벌인 전쟁과 약탈의 주 무대였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생산력이 많이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변방인 익주는 오랜 기간 대규모 전란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피해가 적었습니다. ‘기초 체력’이 앞서는 위나라에 회복할 시간을 주면 국력 차는 점점 벌어질 뿐이라고 제갈량은 판단했습니다. ‘한나라 부흥’을 내걸고 북벌을 감행한 또 다른 이유입니다. 하지만 ‘한나라 부흥’이든 천하 통일이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지인유비 세력을 위한 정치 목표일 뿐 익주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민생 정책은 아닙니다. 그러니 익주에서 군자금을 거둬들이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갈량도 특산품인 비단 생산, 은광 개발 등으로 돈을 모으고, 전방 지역에서는 둔전屯田을 시행해 군량을 자급하는 식으로 익주 사회의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더라도 단기간이면 모를까 수십 년에 걸쳐 전쟁을 감당하려면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익주의 토지·인구·물자에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익주 사회의 불만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희생해야 하느냐’는 불만인 것이죠. 삼국시대의 실제 세력 영역. [자료=시나닷컴] 삼국시대의 인구밀도. 위나라가 차지한 중원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그에 비해 촉과 오는 인구가 적다. [자료=시나닷컴] 마속을 베어 사과한 제갈량 형주에서 촉한으로 유비를 따라온 인재 중 마씨 5형제가 있었습니다. 모두 인재로 알려졌는데, 그중 흰 눈썹 때문에 ‘백미白眉’라고 불린 마량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졌습니다. 덕분에 백미는 지금도 빼어난 인재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입니다. 5형제의 둘째인 마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삼국지』는 마속에 대해 ‘재능과 위엄이 있었고, 군사 전략에 능했으며, 제갈량이 깊이 신임해 두 사람이 접견하면 낮부터 밤까지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북벌에 앞서 제갈량이 남만 정벌에 나섰을 때, 마속은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 심리전을 하는 것이 상책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라는 ‘16자 계책’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을 전하며 인정을 받았습니다. 제갈량이 남만 정벌에서 맹획을 7번 사로잡고 7번 풀어준 ‘칠종칠금七縱七擒’ 일화를 생각하면 두 사람의 시각이 잘 맞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읍참마속 그래서였는지 제갈량은 마속을 1차 북벌의 지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것은 의외의 인사였습니다. 당시 여론이 생각한 지휘관 후보는 유비가 총애하고 경륜이 풍부한 명장 위연과 오의였습니다. 반면 마속은 별다른 경험도 없었고, 유비도 생전에 “믿고 쓰기 어렵다”고 말했기에 그가 중책을 맡을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죠. 제갈량은 이를 통해 형주파의 차세대 리더를 확실히 띄워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는데 촉한의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은 북벌이 가정 전투에서 마속의 오판으로 실패한 것이죠. 제갈량으로선 정치적 위기였습니다. 특히 그동안 소외됐던 익주 그룹과 유장 그룹이 반발하면 정권의 위기로 번질 게 뻔했습니다. 제갈량이 마속의 목을 벤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인의 계급도 3단계 낮은 우장군으로 스스로 낮췄습니다. 중국의 역사학자 옌령은 『삼국지』제갈량전에 나오는 다섯 글자, ‘육속이사중戮謖以謝衆’을 인용해 “마속을 참해 대중에게 사죄했다”고 설명합니다. 마속의 기용과 북벌 실패에 대한 촉한 사회의 분노를 진정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마속이 죽을 때 “그를 위해 통곡한 사람이 십만 명이 넘었다”고 사서는 전합니다. 제갈량의 측근 장완이 “마속을 꼭 죽여야만 했냐”고 원망했을 때,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하가 무너져 갈라지고 전쟁이 끝도 없는데 법을 엄격히 집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적을 이기겠느냐.” 양문석 민주당 안산상록갑 후보는 2월 22일 ‘새날’에 출연해 “열성 당원과 지지자들 분노를 누군가는 전해줘야 한다”며 “개엑스엑스XX가 필요할 때 개엑스엑스를 이야기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유튜브 캡처 조수진 변호사가 논란 속에 사퇴한 강북을은 친명 한민수 민주당 대변인이 전략공천 됐습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비명계 박용진 죽이기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민주당의 3대 축은 호남·친문·친명입니다. 이번 총선 공천에선 친명이 웃고 2개 그룹이 소외됐습니다. 촉한의 익주·유장·유비 3대 그룹에서 유비 그룹이 독주한 것과 닮았습니다. 막말 논란으로 여러 후보들이 사퇴한 가운데도 친명 양문석 후보는 건재합니다. 이종섭 주한호주대사가 21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공항을 떠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읍참마속이 후대까지 전해진 것은 그 대상이 마속이기 때문입니다. 제갈량 자신이 키우고, 자신이 속한 형주파의 차기 리더 마속을 찍어낸 것은 정치적 희생이자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했기 때문에 악화한 여론은 가라앉았고 익주와 유장 그룹도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또한 제갈량은 정국 주도권을 잃지 않고, 2·3·4차 북벌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마속 대신 정권을 살렸기에 제갈량은 만고의 재상으로 남았다는 점을 여야 지도자 모두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J-Hot] ▶ "그 男 넥타이가…" 89세 그녀 꽂힌 韓정치인 누구 ▶ 이범수 부인 또 폭로글 "남편의 기괴한 이중생활" ▶ 우등생 아들 돌변했다, 대치동 엄마 결정적 실수 ▶ "뭐하는 짓이냐" 이천수 분노한 이강인 사과 장면 ▶ 다이소 플라스틱 컵의 배신…싸서 샀는데 이럴 수가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성운 pirate@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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