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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가 된 탈북여성[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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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2회 작성일 24-01-1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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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평양사이/ 주중 아무 때나 출고/ 짐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




2018년 11월, 세계 3대 투자자로 꼽히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이 정유나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유나, 너를 보좌관으로 영입하고 싶다.”

앞서 로저스 회장은 정 씨에게 몇 차례 메일을 보냈다. 정 씨는 장난 메일인줄 알고 무시하다가 마지막 메일에 “만약 회장님이 맞다면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세계적인 대학을 나온 수재들도 많고, 영어를 잘 하는 한국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저를 보좌관으로 영입하려 합니까?”

정 씨의 질문에 로저스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I saw your dazzling brain through your eyes.네 눈을 통해 너의 눈부신 두뇌를 봤다”

그리곤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 같은 투자자들은 사람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 나는 고맙게도 그 능력을 30대 초반에 가진 것 같다. 너는 매우 열정적이고, 북한 출신임에도 영어도 아주 잘한다.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너의 역량을 봤다. 내가 왜 너를 굳이 영입하려는지 지금은 이해를 하지 못하겠지만, 나랑 같이 일을 하면 알게 될 것이다.”

전화가 오기 얼마 전 로저스 회장은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와 화상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정 씨가 영어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 정유나와 짐 로저스 회장과의 첫 만남 영상 =>https://tv.nate.com/clip/1920786

며칠 뒤 정 씨는 로저스 회장의 초대를 받아 부산으로 내려갔다. “북한에 전 재산을 투자하고 싶다”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은 로저스 회장은 당시 3년 임기로 대북투자기업인 ‘아난티’의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부산에 내려간 정 씨는 어리둥절했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7~8명의 남성이 그를 영접하더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호텔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로저스 회장이 그를 맞아주었다.

그날 정 씨는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로 임명돼 이후 함께 세계를 누볐다. 로저스 회장이 만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거물들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로 정 씨는 2019년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담 만찬 때를 꼽았다. 당시 로저스 회장의 소개로 그는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앞에서 북한의 실상을 이야기했는데, 모든 정상들이 그의 말을 경청하며 박수를 보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2년 2월 짐 로저스 회장과 만날 때 이들의 대화를 통역한 사람도 정 씨였다.

서울과 평양사이/ 주중 아무 때나 출고/ 짐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




● 북한 오지에서의 어린 시절

세계적인 거물 투자자의 개인비서실장Personal executive secretary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 씨는 1988년 북한에서도 가장 오지로 꼽히는 자강도 전천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인 스키부대 대대 참모장이었다. 스키부대는 특성상 비밀 유출 방지와 특수훈련을 위해 산간오지에 주둔한다.

정 씨의 어린 시절 추억은 온통 산과 관련된 것이다. 군부대 주둔지엔 동갑내기도 없어 두세 살 나이 많은 오빠들과 울창한 산에서 오미자, 다래, 두릅을 따고 계곡과 폭포수에서 수영을 하고 가재를 잡고, 허리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학교에 가던 삶이 일상이었다.

어린 유나가 꽁지머리를 촐랑이며 걸어가면 군인들이 ‘새끼 참모장’이라고 놀렸다.

정 씨는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았다. 공부도 학급에서 제일 잘했고, 노래나 시낭송 대회가 열리면 늘 1등을 독차지했다. 담임선생이 그에게 늘 “유나는 커서 인민배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인민학교에 다니던 때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나 특수부대에는 공급이 좋았던 터라 유나는 배고픔을 몰랐다.

어느 날 “계란 후라이를 왜 안주냐”고 투정을 부리는 유나를 아버지가 부르더니 “부대 바깥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못 먹는데, 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 혼을 냈다.

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유나도 현실을 깨달았다. 군부대 마을 아이들은 인근 농촌마을 애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그의 반에서도 세 명이나 굶어죽었다. 능쟁이 독에 올라 눈사람처럼 퉁퉁 부었다가 죽은 같은 반 남학생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어느 날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밤에 조용히 나누는 대화도 엿들었다.

“여보, 이러다가 우리도 배급이 끊기는 것 아닙니까. 그럼 나도 산에 가서 길짱구질경이를 캐야 하는데 명색이 참모장 아내이고 직맹위원장이니 달밤에 몰래 나갈 수밖에 없네요.”

다행히 어머니가 풀을 뜯으러 나가는 일은 없었다.

공부를 잘했던 정 씨는 인민학교를 졸업한 뒤 자강도 소재지에 있는 수재학교인 강계1고등 중학교에 입학했다. ‘자강도는 장군님의 제2의 고향’ ‘강계정신’ 등의 빨간 간판이 곳곳에 걸려있는 풍경이 낯설기는 했지만, 도시 생활은 나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있진 못했다. 1997년 여단 참모장대좌 직책으로 백두산에 동계훈련을 나갔던 아버지가 스키에 손가락들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1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었다. 부대에선 부친에게 여단 고문으로 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부친은 고향인 함북 회령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1999년 정 씨는 아버지와 함께 회령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과 평양사이/ 주중 아무 때나 출고/ 짐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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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도시에서 받은 충격

국경도시인 회령은 그가 자라며 알던 세상과 너무 달랐다. 꽃제비도 많았고, 동창들은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치는 동창들에게 그가 “아니, 장군님께서는 쪽잠에 줴기밥주먹밥을 드시며 현지 지도를 나가시는데, 우리가 여기서 도둑질이나 하면 되냐”고 하자 아이들이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너 멍충이 아니야? 선전부에서 나온 것 같구나. 배가 불러야 장군님 지키지 않겠어”라고 대답했다. 자강도에서 ‘우리는 장군님이 기억하는 사람들’이란 집단 최면 속에서 살던 그는 충격을 받았다.

정 씨는 전학 오자마자 스타가 됐다. 독특한 자강도 억양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학과 영어도 학교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다.

정 씨에겐 두 살 위 오빠가 있었는데 그 역시 학교에서 늘 1등을 도맡았다. 오빠는 북한 최고의 수재들에게 수여하는 ‘7.15최우등상’을 받았다. 이 상을 받으면 무조건 김책공대 등 중앙대학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오빠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에 입대했다. 이유는 오빠가 173㎝로 학교에선 큰 키에 속했고, 출신 성분도 좋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각 지역마다 중앙당 5과 선발 대상을 할당하는데, 5과 지도원들은 당에서 내리 먹인 할당 인원을 채우기 위해 중학교를 돌면서 인원을 선발해 관리한다.

오빠가 졸업한 뒤 부모들이 김책공대에 보내려하자 5과 지도원이 “회령에서 7명을 뽑아 이미 당에 명단을 보냈는데, 이를 거부하면 정치적으로 걸린다”고 협박했다. 나중에 들으니 수재 오빠가 친위대라는 974군부대에 입대해 한 일은 외진 산골에 있는 김정일의 별장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정 씨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정숙교원대학 교원학부 음악과에 입학했다. 이곳은 인민학교 음악교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자 “날라리 같은 애들과 어울리지 말고 남조선 드라마 같은 것은 절대로 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야말로 밖에 나가 누구보다 많이 남조선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신사동 그 사람’을 흥얼거렸다. 조금 더 취하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종신 대통령이냐. 김정일 저 ××가 나라를 다 망친다”고 욕을 퍼부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입을 막으며 “우리가 당신 때문에 관리소에 갈 거다”고 푸념했다. 사실 아버지는 군에 있을 때부터 집에 들어와 TV를 보다가도 쩍하면 “군대도 안 가본 게 최고지도자라니. 우리가 나라를 지키는 군대이지, 김정일을 지키는 군대냐”고 욕을 퍼부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에게 남조선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하니 그 당부가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서울과 평양사이/ 주중 아무 때나 출고/ 짐 로저스 회장의 수행비서




● 한국 드라마에서 받은 충격

대학에 입학한 정 씨는 가야금을 전공하는 친구를 사귀게 됐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남조선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부터 정 씨는 난생 처음 접하는 한국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아버지가 늘 말하던 “벽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무엇인지 알았다.

‘가을동화’를 시작으로 ‘황태자의 첫 사랑’ ‘목욕탕집 남자들’ ‘순풍산부인과’ ‘이브의 모든 것’ 등 숱한 한국 드라마가 회령에서 돌고 있었다.

‘이브의 모든 것’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느꼈다.

“장동건이 채림에게 고백했다가 차이는 장면이 있어요. 그 뒤 그는 집에 가서 파란 수첩을 꺼내들고 미국으로 날아가요. 그걸 보면서 아니 나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국가 공무도 아니면서 개인 사정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생각했죠. 인천공항에 각종 비행기가 엄청 많았는데 처음 보는 것들이었죠. 북한 애들은 비행기를 그리라면 다 똑같이 그려요. 비행기라곤 영화에서 본 6.25때 미그15 전투기가 유일했거든요. 그리고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배웠는데, 미국을 마음대로 가고, 미국인들과도 너무 잘 지내는 겁니다. 저는 남조선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을 보면 일제 악질 순사를 만난 것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 숙여야 하는 줄 알았어요.”

드라마는 거짓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회령에는 드라마 외의 영상도 많이 돌았다.

“총리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뿌리는 영상도 봤는데, 북한 같으면 가족까지 다 잡혀갈 건데 저런 일을 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돌도 아닌 먹을 것을 마구 던진다는 것도 놀랐어요. 연예인 시상식도 봤는데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TV를 향해 ‘엄마 보고 있어’라고 하는가 하면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말도 나왔어요. 회령에선 미신을 믿었다는 이유로 종종 사람을 공개처형했는데, 저긴 저렇게 신을 자유롭게 믿어도 되는구나 싶어 놀라웠죠.”

드라마를 접한 뒤 정 씨는 더는 북한에서 살 생각이 없어졌다. 대학에서 배워주는 혁명역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꿈속에서도 원빈이나 송승헌이 나올 때쯤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그때가 2006년 1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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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향해 떠나다

정 씨는 수소문을 통해 강을 넘겨줄 사람을 찾다가 한 국경경비대 중대장을 소개받았다.

“얼마 주면 중국에 보내줄 거냐”고 묻자 중대장은 100달러라고 했다. 당시 경비대에 도강비로 주는 돈은 10달러 정도가 일반적이었지만, 정 씨는 그런 사정을 몰랐다.

그는 집에 와서 집 천정에 숨겨둔 아버지의 비자금을 훔쳤다. 외화를 돌돌 말아둔 덩어리가 3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꺼냈더니 1200달러였다. 그 돈이면 당시 회령에서 집 서너 채를 살 수 있었다.

중대장에게 100달러를 주니, 그는 직접 정 씨를 데리고 자신이 병사 시절 근무했던 먼 지역으로 데리고 가서 두만강을 건넜다. 그날이 2006년 3월 2일이었다.

강을 건너는 데는 대략 3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산을 타니 낙엽이 워낙 많이 쌓여 소리가 요란했다. 이때 등 뒤에서 총소리가 7번 터졌다. 당시는 국경을 건너는 사람을 사살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고 한다. 다행히 추격은 없었다.

중대장이 자기가 친하게 지낸다는 중국의 한 촌장 집에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곤 “이 아가씨한테 1000달러가 있으니 절대 인신매매범에게 넘기지 말고 한국행 브로커에게 바로 인계하라”고 당부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중대장이 다시 강을 건너왔다.

“유나야. 너를 보내고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보니,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남조선에 꼭 가야 되겠냐. 내가 집이 평양이고 집도 잘 사는데, 나랑 결혼해 평양에 가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

중대장의 고백에도 정 씨의 뜻은 단호했다. 설득시키지 못한 중대장은 돌아가면서 “동남아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꼭 촌장의 집에 전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촌장에게 500달러를 주니 다음날 멋진 승용차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떠났다.

옌지, 베이징, 쿤밍 등을 거치면서 정 씨는 신이 났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구멍이 난 청바지를 입으니 드디어 내가 원하던 세계가 가까이 오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노래방에 가서 마음 놓고 남조선 노래를 부르니 희열도 솟구쳤다.

베이징에서 한국으로 가는 다른 탈북민들과 합세해 일행은 11명으로 늘어났다. 태국에 도착해 경찰에게 단속되기도 했지만, 이때 유나의 영어가 통했다. “100달러 줄 테니 우리를 풀어 달라”고 하자 경찰이 돈을 받고 사라졌다. 일행을 이끌고 한국 식당으로 찾아간 것도 유나였다. 문 밖에서 보니 식당 여주인의 머리 스타일이 한국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같았다.

그 식당 주인 내외의 도움으로 일행은 방콕으로 와 한인교회에서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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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기관에서 만난 아버지

방콕에서 3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며 머물던 그는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드라마에서 보던 비행기를 타보니 너무 떨려 신발을 벗고 타려 했고, 한국 땅이 아래에 보일 땐 눈물이 절로 났다.

인천공항은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멋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대리석을 처음 보는 그는 미끄러질까봐 얼음판을 걷듯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뒤의 미래로 간 것 같았다.

조사기관에 들어갔을 때 그의 수중에는 200달러가 남아 있었다. 조사관들은 북에서 탈북해 곧바로 어린 소녀의 품에서 큰 돈이 나오자 아버지가 뭐하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8월 초 조사도 끝나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자 마당에 나가 운동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유나야”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올려다 보니 4층 창문에서 머리가 길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회령에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왜 여기 있지?”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도망간 딸을 잡겠다고 중국에 넘어왔다가 공안에 체포됐다. 하지만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던 아버지는 달리는 차에서 공안을 제압하고 탈출했다. 이후 딸이 한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37일 동안 산을 타고 3000리를 행군해 대련까지 온 뒤 위조여권을 구해 한국으로 오는 배를 타고 건너왔다. 정 씨가 방콕에 머무는 3개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정 씨는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보고 “너 살아 있었구나. 건강히 지내다가 사회에 나가서 보자”고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정 씨는 하나원을 거쳐 2006년 11월 사회로 나왔다. 아버지는 조사 기간이 길었다.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 보니 하나원을 거치지 않고 한미일의 합동 조사만 6개월을 받은 끝에 이듬해 3월 사회로 나왔다. 정 씨는 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분당에 임대주택을 받고 살게 됐다.

정 씨는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돈을 모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간 어머니를 2년 뒤에 구출해 한국에 데리고 왔다. 정 씨가 탈북한 뒤 974군부대에 복무했던 오빠는 오지로 쫓겨났다. 어머니를 데려온 이듬해 오빠도 한국에 데려왔다.

처음 오빠와 통화했을 때 군에서 세뇌된 오빠는 “내 앞길을 막은 유나를 총으로 쏴죽이겠다”고 펄펄 뛰었다. 하지만 부녀가 돈을 보내지 않자 6개월 뒤 중국으로 탈북해 “나도 데려가달라”고 연락해왔다. 이후 오빠는 연세대와 해외 유학을 거쳐 현재 유명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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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용사로 시작한 정착

정 씨의 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다. 남조선에만 가면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며칠도 되지 않아 끝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첫 직업은 커피숍 알바였는데, ‘카라멜 마키아토’ ‘블랙티 레모네이드’와 같은 생소한 단어에 쩔쩔 매며 실수를 연발하다가 일주일 만에 쫓겨났다.

두 번째로 찾은 직업은 편의점 알바였는데, 저녁 8시에 나가 새벽 타임을 근무했다. 아침에 들어와 4시간 정도 자고 미용학원을 열심히 다녀 8개월 만에 미용사 자격증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도 회답이 없었다. 그는 직접 동네 미용실을 찾아나섰다.

“원장님, 저는 북에서 왔는데요. 시키면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취직 좀 시켜주십시오.”

하지만 20세도 안된 그를 선뜻 받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니온미용실’ 김태연 원장을 만났다. 정 씨를 안쓰럽게 여긴 김 원장은 그를 키워주기로 했다.

처음 몇 달은 너무 힘들었다. 샴푸독이 올라 손에서 피가 줄줄 났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버스비조차 아끼다보니 7~8개 정거장 거리를 걸어 다녔다. 퇴근길에 너무 힘들어 벤치에 앉아 혼자 슬피 운적도 많았다.

나중에 한 예술대학 문화예술전공 학부에 입학하기도 했지만, 일과 병행하기 힘들어 2학년 때 자퇴했다. 그는 외국에 나가기를 꿈꿨다.

그래서 인근 지구촌교회에 나가 4년 넘게 외국인들과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나중에 해외 유학을 간 오빠를 따라가 반 년 동안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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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나의 꿈

10년 동안 미용실에서 일하며 이제는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는 자신감이 붙었을 때 인생을 바꾼 일이 벌어졌다.

이만갑 제작진이 수소문 끝에 그에게 출연해달라고 요청을 해온 것이다. 2017년 이만갑에 처음 나간 그는 고정 출연자가 되게 됐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왔다. 고민 끝에 그는 미용실 일을 그만두고 방송인으로 살기로 했다.

2018년 짐 로저스 회장과 화상 인터뷰를 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꾼 또 다른 계기였다.

코로나가 퍼지기 전까지 1년 남짓 기간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수행비서 겸 북한을 알리는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코로나 이후 로저스 회장은 그에게 “난 이제 해외에 거의 다니지 않고 필요하면 부를 것이니 너는 한국에서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의 끼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강연, 공연, TV, 라디오 출연으로 스케줄이 빈틈없이 가득 찼다. 1월 초에도 부산에서 삼성생명, KB 손해보험 FC들을 대상으로 꿈과 동기 부여에 관한 강연을 3일 연속 한 뒤 곧바로 미국 공연길에 오른다. 공연은 그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다. 바이올린과 손풍금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노래까지 잘 부르는 그는 탈북예술인 공연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하지만 그의 꿈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제가 세계 유명 정치인, 경제인, 금융인들을 많이 만나보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자신감과 꿈이 커졌어요. 앞으로 제 꿈은 한반도를 위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탈북 여성 정치인도, 외교관도 없잖아요. 저는 로저스 회장님과 동행하면서 어떻게 외국 투자자들과 정상들이 투자를 하게 만드는지도 배우게 됐습니다. 통일되면 저는 한반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남북이 통일되면, 그때에야 말로 통일부가 할 일이 많아질 것인데, 통일부 장관을 탈북민이 못할 이유가 없죠.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삶을 통해 꿈을 꾸는 사람에게 길이 보이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정유나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십시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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