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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성 극우, 논리만으로 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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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5-02-1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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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불평등이 낳은 ‘무의미의 폭력’… 사라진 세계관 복원할 ‘공감’의 기획 필요

대통령 윤석열 등 ‘내란죄 피의자’들의 방어권 보장 권고 등을 담은 안건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2차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2025년 2월10일 오후 서울 중구 인권위 건물 1층에서 윤석열 지지자들이 ‘윤 대통령 인권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극우주의가 많은 사람에게 호응받는 건 서사의 단순성 때문이다. 인간은 이유 없는 고통을 싫어하며 그래서 설령 허구일지라도 고통의 근원을 찾아내려 한다. 주류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여기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좌파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너무 거창한 대답을 내민다. 하지만 극우파는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이게 다 무임승차자와 불순세력 때문이다. 난민·이주민, 무슬림, 중국인, 호남인, ‘김치녀’, ‘종북세력’, ‘빨갱이’, 장애인, 성소수자들이 기여도 없이 보상만 챙기면서 나라를 망가뜨린다.”





능력주의라는 가짜 정의




사회학은 사람들이 삶을 이해하기 위해 동원하는 믿음체계를 연구해왔다. 고전적 이론으로 막스 베버의 ‘고통과 행복의 신정론’이 있다. ‘고통의 신정론’은 내 고통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답을 찾는 과정이다. ‘행복의 신정론’은 주로 지배집단의 논리로서, 내 행복을 정당화하는 서사다. 이 고통과 행복의 서사는 현대에 이르러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통합된다. 능력주의란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는 신념체계다. 흔히 능력주의는 세습주의와 반대되는 진보적 이념으로 이해되지만,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평등을 적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위계서열을 당연시하는 차별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세습주의와 능력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특히 극우의 대표감정인 ‘약자 혐오, 강자 선망’의 근거가 능력주의임을 염두에 두면, 능력주의는 좌파 이념이 아니라 우파·극우 이념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능력’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모호할 뿐 아니라 그런 게 있다 해도 순전히 개인에게 속한 것이라 볼 수 없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정당한 차별의 기준이 될 수 없다.1



오랫동안 능력주의는 대단한 정의 원칙인 양 추앙됐다. 그 결과 특정 대학이나 특정 시험에 통과한 자들, 예컨대 윤석열 같은 자에게 과도한 특권이 주어졌고, 그러지 못한 대다수에겐 차별과 멸시가 일상이 됐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너무 강해지면 민주주의는 ‘회원제 민주주의’Membership Democracy로 변질한다. 그것은 ‘울타리 안 평등에는 민감하지만 울타리 밖 비참에는 무관심한 민주주의’다. 그런 사회에서는 겉으로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은 승자·강자의 기득권을 옹호하며 약자·소수자를 억압하는 선택적 정의가 판친다. 이제 민주주의나 헌법적 가치는 텅 빈 기표, 공허한 약속,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다론 아제모을루는 최근 한 칼럼에서 “양극화가 민주주의와 제도에 대한 불신을 강화하고 그 불신은 다시 민주주의의 필수요소인 정치적 타협을 어렵게 만들어 국가 전체를 위협한다”고 경고한다.2







무너진 헌정 체제와 사회적 합의




법원을 때려 부수는 극우는 바로 그런 사회에서 출현한다. 극우의 폭력성은 그간 능력주의라는 외피에 가려져 있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힘 숭배’Worshipping Power다. 우월함과 열등함의 구분을 통해 자신이 비교우위에 서 있음을 끝없이 즐기려는 경향성. 그 나르시시즘적 욕동욕망-충동이야말로 무시, 혐오, 차별주의의 근원이다.



미국과 한국의 일부 민주당 지지자는 극우·보수에 동조하는 빈곤층·약자를 향해 “무식하고 멍청해서 자기편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비웃어왔다. 그러나 뭘 모르는 건 오히려 그쪽이다. 빈곤층·약자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진보 엘리트를 지지하는 것보다 그들의 위선을 속 시원히 욕해주는 세력에 동참하는 것이 정치적 효능감이 훨씬 클 수 있다. 토마 피케티는 그가 “브라만 좌파”라 불렀던 진보 엘리트, 곧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입으론 평등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불평등을 악화시켜왔음 지적하며, 하층민을 대변해줄 정당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들이 극우에 가세하게 된다고 말한다.



양상과 성격은 다르지만 유럽과 미국, 과거에 이른바 ‘1세계’라 불렸던 나라 상당수가 극우 세력의 언어적·물리적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윤석열 내란을 둘러싼 이 아수라장은 ‘1987년 체제’의 붕괴라는 한국사적 맥락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반구의 번영을 지탱하던 사회적 합의의 파기와 무관하지 않다. 헌정 체제와 사회적 합의는 모두 일종의 약속이고 공유된 믿음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면 국가와 기업은 복지와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약속의 내용보다 중요한 게 당사자다. 약속이 지켜지려면 무엇보다 그 당사자가 세계 속에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리를 확인함으로써 인간은 세계 속의 존재로 안정되며 살아갈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광범위한 ‘반극우 연합’ 만들어야




그러나 30년 넘는 신자유주의 공습은 세계와 개인들을 이어주던 연결고리를 끊어냈고 각자도생이 유일한 이념이자 생활방식이 됐다. 원자화된 개인은 각자의 고통과 행복에만 갇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공적 세계’가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각자도생의 다른 이름은 ‘세계 없음’Worldlessness이다.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조차 주체가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는 인식론적 지도를 제공했지만 글로벌 자본주의는 그러한 인식론적 지도를 제공하지 않는다. 유일한 저항의 형식은 무의미한 폭력이 된다.”3



막장에 다다른 능력주의와 ‘세계 없음’이 오늘의 극우를 만든 토양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사실관계조차 무시하는 무의미한 폭력으로 현현한다. 그런데도 왜 점점 세가 커질까? 무의미성 자체가 놀이적 재미를 만들고 주목을 끌어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극우에는 객관적 사실에 기반을 둔 논리적 비판과 계몽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객관적 비판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다른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2006년 1월12일 서울 프레스센터 앞에서 열린 황우석 지지자들의 손팻말 시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무엇을 할 것인가? 대증요법과 원인요법의 두 방향으로 나눠볼 수 있다. 대증요법 차원에서는 법률과 사실에 기반을 둔 헌정 수호 투쟁이 시급하다. 법·제도,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크게 약해지긴 했으나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다. 윤석열 일당을 재판정에 세울 수 있었던 힘도 여기서 나왔다. 그 힘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김진숙에서 논객 조갑제에 이르는 광범위한 ‘반극우 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과 이재명에 대한 반감이 곧바로 내란세력 지지로 연결되지 않도록 일종의 ‘중간지대’를 마련하고, 극우세력의 논리적 모순과 불법성을 부각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20년 전 대한민국을 둘로 갈라놓은 황우석 논문 조작 사태 당시, 황우석 지지율은 지금 윤석열 지지율보다 훨씬 높았다. 적게는 84%, 심지어 어떤 조사에선 98%라는 믿기 힘든 숫자가 나왔다. 사실과 증거에 집중한 언론인·과학자의 외로운 싸움 끝에 황우석은 퇴출됐지만 사건이 남긴 후유증은 크고 길었다. 당시 각종 음모론을 유포하며 황우석 지지 여론에 크게 기여한 김어준은, 사과는 고사하고 승승장구하며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스피커 중 하나가 됐다. 그래서 특히 주의해야 한다. 김어준 같은 ‘우리 편 음모론자’는 극우 음모론 비판의 설득력을 깡그리 파괴하는 위해 요소다. 반극우 전선의 성패는 김어준 같은 자를 배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접촉·돌봄으로 ‘누구나의 민주주의’를




대증요법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번에 윤석열 일당과 극우세력 일부를 처벌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뿌리’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윤석열은 또다시 나온다. 근원은 앞서 말한 불평등·양극화, 능력주의, 힘 숭배 등이다. 이는 그야말로 ‘구조적 문제’라서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다. 분명한 건 해결의 열쇠가 논리가 아닌 ‘감정’에 있다는 점이다. 극우주의는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똬리를 튼 ‘감정 서사’이며 논리적 설득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감정은 이성으로는 통제될 수 없고 다른 강력한 감정으로만 제어될 수 있다’고 했다.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에 따르면 증오, 혐오 같은 타자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타자를 전혀 모르거나 자주 접촉하더라도 그 접촉이 피상적일 때 강해진다. 반면 타자와 ‘깊이’ 접촉하고 교류하게 되면 편견은 극적으로 줄어든다. 그것은 동질성 강화, 즉 같은 부족이 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타협의 여지를 만드는 일에 가깝다. 즉, 공감을 통해 세계 속에 각자의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더 나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약속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트랙터와 응원봉이 남태령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일상에서 늘 경험하던 ‘회원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누구나의 민주주의’를 목도했다. 그 기적을 가능케 한 건 깊은 접촉과 서로 돌보는 감정이었다. 다시 만들 세계는 바로 그 마음에서 시작돼야 한다.





1. 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 이데아, 2021년.



2. 다론 아제모을루, ‘The real threat to American prosperity’, 파이낸셜타임스, 2025년 2월8일.



3. 슬라보이 지제크,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버소, 2012년.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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