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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경기 양평군 지평면 옥현1리 광양 행복학교에서 이강옥70 이장이 어르신들에 한글수업을 하고 있다.2024.01.14./뉴스1 양희문 기자
양평=뉴스1 양희문 기자 = "어휴, 답답했지. 이름 석 자도 못 썼었으니까. 간판도 못 읽어, 버스 노선도 못 봐 시내 나가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그래도 우리 이장님 오시고 나서는 이름도, 일기도 쓴다니까. 배움의 즐거움을 깨달았어."
인구소멸 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빈집과 어르신만 남은 동네는 활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 옥현1리 광양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마을이 2019년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33년간 교편을 잡고 귀촌한 이강옥 씨70가 이장이 되면서부터다. 그가 학교를 열고 어르신들에게 글을 알려주면서 마을은 배움의 열정으로 활력을 되찾고 있다.
◇"못 배운 한 이제 풀어"…배움의 터 광양 행복학교
2019년 10월8일 양평군 지평면 옥현1리에 광양 행복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마을 이장 이강옥 씨가 글을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만든 문해 학교다. 교사 출신 이 씨는 직접 한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현재 마을에서 글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14일 오후 2시께도 수업이 한창이었다. 아흔을 바라보는 이영집89 할머니는 한 손에 연필을 꼭 쥐고 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힐끗 쳐다보자, 이 할머니는 "잘 못 썼다"며 부끄러워하면서도 자랑하고 싶은지 일기장을 보여줬다. 오늘은 고추장을 담갔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장에 가서 멸치를 사왔다는 내용이었다.
강원 원주 출신인 이 할머니는 19살 때 이 마을로 시집와 평생을 살고 있다. 어려운 환경 탓에 학교는 꿈도 못 꿨다. 결혼 이후에는 먹고 사느라, 자식들 키우느라 공부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글을 몰라 시내에 나갈 때는 불안감에 항상 의기소침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다던 이 할머니는 배움의 갈증에 늘 허덕였다.
광양 행복학교 학생 홍순옥78 할머니가 자작시 가을을 낭독하고 있다.2024.02.14./뉴스1 양희문 기자
광양 행복학교는 이 할머니에게 배움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공간이었다. 그는 매주 이곳을 찾아 읽고 쓰며 글을 익혀나갔다. 처음에는 이름 석 자부터 시작해 지금은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담은 일기까지 쓸 수 있게 됐다. 이 할머니는 "먹고살기 바빠 젊어서 배우지 못한 응어리가 가슴 속에 있었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한이 풀렸다"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새 찌는 듯한 여름이 지나가고 성큼 가을이 문 앞에 온 것 같구나. 이 산, 저 산에 단풍으로 새 단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귀뚜라미야, 네가 울 땐 내 마음도 서글퍼지는구나. 울지 마라 귀뚜라미야. 그만 울어라."
홍순옥78 할머니가 가을이란 제목의 자작시를 학생들 앞에서 읊었다. 그가 가을을 맞으며 느낀 감정을 글로 표현한 시라고 한다.
광양 행복학교 학생인 한 할머니가 쓴 일기./뉴스1 양희문 기자
◇서울서 33년 교사생활 후 시골학교 교장으로
이강옥 씨는 양평 태생이지만 줄곧 서울에서 자랐다. 직장도 서울 일신여상에서 전산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이 마을은 할머니 집이 있어 방학 때마다 놀러오는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그런 그가 33년간 교사 생활을 마치고 선택한 곳이 광양마을이었다.
이 씨는 2015년 아내와 함께 이 마을로 귀촌했다. 친척이 많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외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일손 돕기 등 마을을 위한 일이라면 선뜻 나섰다. 이윽고 마을 어르신들은 이 씨를 인정했고, 그는 2019년1월 마을이장까지 하게 됐다.
이 씨는 행사 준비 등으로 주민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많은 어르신이 자기 이름조차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배우지 못해 평생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이 모습을 옆에서 평생 봐온 이씨는 어르신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문해학교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2019년 10월 마을회관 2층에 광양 행복학교가 개소했다.
광양 행복학교 교장이자 광양마을 이장인 이강옥70 이장/뉴스1 양희문 기자
광양 행복학교 교장이자 선생인 이 씨는 5년째 한글수업, 노래교실을 진행하며 어르신들에게 배움의 기쁨과 놀이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있다. 나아가 올해부턴 면사무소에서 재고로 남은 컴퓨터도 들여와 기본적인 컴퓨터 사용 방법도 함께 가르치고 있다.
이 씨는 교사 시절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르신들이 글을 깨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다. 이 씨는 "학생들이 좋은 곳에 취업하는 모습도 보람을 느끼지만 그때는 돈을 받고 일했다"며 "지금은 일체 돈 받는 것 없이 재능기부로 내 것을 온전히 주는 것이기 때문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yhm9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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