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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석열이 형은 법보다 밥이야"…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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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4-12-2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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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6월22일 베트남 하노이 국가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베트남 파트너십 박람회 중 K-푸드 박람회를 방문해 김치로 만든 반미 샌드위치를 맛보고 있다. 연합뉴스


내 어머니는 야심 찬 여성이었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어머니는 전화를 하실 것이다. 지난 몇년간 반복된 불평을 시작할 것이다. “너는 왜 매번 내 이야기를 써먹냐. 주변 엄마들 보기 부끄러워 바깥을 나돌아다닐 수가 없다”로 시작되는 익숙한 불평이다. 어쩌겠는가. 글쟁이가 늙어서 소재가 떨어지면 결국 주변 사람들 서사를 파먹기 시작하게 마련이다.




내가 항상 하는 소리가 있다. 글 쓰는 놈이랑 사귀지 말라는 것이다. 헤어지는 순간부터 당신은 그놈이 별 볼 일 없는 원고료 따위에 당신과의 내밀한 기억을 팔아먹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도 연애 상대로는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고백이다.



어쨌든 내 어머니는 야심 찬 여성이었다. 시집을 너무 일찍 간 탓에 많은 본체의 야심은 실현될 수 없었다. 1970년대는 야심 찬 여성에게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시대였다. 어머니는 대신 야심 2개, 아니 아들 둘을 낳았다. 야심 2개를 ‘사’자 들어가는 직업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야심도 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글에는 다량의 농담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길 당부드린다. 독자 여러분이 아니라 독자인 어머니에게 드리는 소리다.



하여간 내 어머니는 야심 찬 여성이었다. 야심을 성사시킬 계획은 치밀했다. 큰아들은 검사, 작은아들은 의사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돌아보니 치밀한 계획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저는 돈 안 되는 예술 따위를 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 같습니다’라는 태도로 늘 스케치북에 그림만 그려댔다.



사람은 행복한 걸 하고 살아야 한다. 나는 예술가가 되지도 못했다. 인공지능 발전으로 가장 존재를 위협받는 직업 중 하나인데다 예술가보다 더 돈이 안 되는 기자가 됐다. 우리 대부분이 언제나 약간은 불행한 이유는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로 먹고살지 못해서다.



어머니는 자신의 디엔에이DNA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 디엔에이도 약간은 신뢰했던 것 같다. 내 자식들은 분명 똑똑할 것이다. 우리보다 진화할 것이다. 모든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다만 다행이었다. 어머니 야심은 반타작은 했다. 동생은 결국 의사가 됐다. 나처럼 태생적 문과이던 동생이 왜 의대를 선택했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답변은 10여년 뒤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너를 보고 있으니 이 집안 재산에 기여할 위인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자기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단다” 역시. 반면교사다. 나도 젊은 날 어머니 야심에 일정 정도 공헌은 한 셈이다.



윤석열을 보며 항상 그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다. 그의 아버지는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 창립 멤버인 경제학자 고 윤기중이다.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화학자 최성자다. 나는 그들의 야심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첫아들을 낳았을 때 그들의 야심은 하나가 더 추가됐을 것이다. 경제학자와 화학자의 디엔에이를 결합하면 뭐가 됐든 그보다 더 나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는 야심 말이다. 나는 그걸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부모에게 자식은 야심이다. 요즘은 좀 다르다곤 하더라만, 그 시절에는 분명히 야심이었다.



부모 디엔에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윤석열은 1979년 서울대에 합격했다. 계획대로라면 윤석열은 심리학과에 진학해 상아탑에 갇힌 교수가 됐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술도 잘 사주는 호방한 교수로 꽤 인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아버지의 야심이 또 작동한다. 그는 심리학과에 가려는 아들에게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법조인이 되는 게 가장 쉽고 안전할 것”이라는 조언을 던졌다. 고 윤기중은 훌륭한 학자였지만 아들의 재능이 정확하게 어디를 향하는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검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던 한때의 내 어머니처럼 말이다.



2024년 9월 27일 한겨레 그림판.


윤석열은 법에 별로 재능이 없었다. 사법시험 9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동시에 붙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사법시험 9수는 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를 경제적으로 책임지는 부모의 판단과 야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 시절 티브이에 나와서 한 증언에 따르면 부친은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고무호스로 두들겨 패는 근엄한 원칙주의자였다고 한다. 나와 친분이 있는 그 세대 학자들 증언에 따르면 고 윤기중 댁을 방문하면 추리닝 차림의 기가 좀 죽어 있는 덩치 큰 고시생 아들이 인사를 하고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윤석열 부모님의 야심은 아들이 고시를 여섯번 낙방한 시점에 멈추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법에 재능이 없었다. 계엄 포고령의 법률 검토를 직접 했다는 진술을 생각해 보시라. 법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법률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물론 이 모든 건 농담이다. 나는 자식의 실패, 아니 패악질의 원인을 온전히 부모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믿는다. 내가 검사가 되지 못하고 기자 따위가 되어 이런 농담을 원고료 받고 쓰고 있는 것이 내 부모님 탓은 아니듯이 말이다. 아니다. 이 모든 게 모두 농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식의 재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스스로 살길을 찾도록 만드는 것도 부모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재능이다. 내 새끼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 가장 잘 아는 건 역시 부모다.



고 윤기중은 윤석열에게 “너는 검사 때려치우면 변호사 하지 말고 식당이나 해라”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조언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을 가장 정확하고 명확하고 적확하게 판단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윤석열이 용산 삼각지 근처에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서울에서 제일 잘하는 식당을 차려 성공한 대체 역사를 상상하는 중이다. 서울대 법대 출신 검사 변호사 후배들이 찾아와 “역시 석열이 형은 법보다는 밥이야”라고 이를 쑤시며 감탄을 내놓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중이다.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다. 모두가 즐거웠을 것이다. 모두가 밥은 잘 먹고 다녔을 것이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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