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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이 일상이 된 사회…"꽉 잡으세요, 나락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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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8회 작성일 24-06-0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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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누군가를 끝장내는 게 유행
‘나락’을 아십니까?

전남 화순 쌍봉사에 그려진 벽화에서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어두컴컴한 흑암지옥을 그린 것이다. /쌍봉사

전남 화순 쌍봉사에 그려진 벽화에서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어두컴컴한 흑암지옥을 그린 것이다. /쌍봉사

“나락 간다” “나락 보내자”.

도처에 생지옥이 있다. 젊은 네티즌은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에게 ‘나락’ 딱지를 붙인다. 모두의 비난 대상으로 전락하면 “나락에 떨어졌다”고 한다. 나락행行 장본인은 그 즉시 방송 출연, 광고 모델 등 사회적 활동에서 쫓겨난다. 옛 잘못까지 까발려진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유명세가 무시무시한 ‘악명’으로 뒤집히는 건 찰나다.

‘나락那落’은 극락極樂의 반대말처럼 쓰인다. 4~5년 전부터 인터넷 유행어가 됐다. 구글에 따르면 ‘나락’ 검색량은 2019년 3월부터 증가해 지난달에는 그때의 10배로 늘어났다. 지옥을 뜻하는 고대 인도말 ‘나라카naraka’를 한자음으로 발음한 것. 고색창연하며 종교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처럼 끝장났다’는 속어로 쓰고 있다. 사람을 끝장내는 것이 유행이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 박모왼쪽씨가 일하는 모습이 2022년 방송인 백종원오른쪽이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에 잡힌 모습. 최근 이 영상이 뒤늦게 퍼지면서 박씨는 신상 정보가 털리는 등 ‘나락’ 가게 됐다. /유튜브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 박모왼쪽씨가 일하는 모습이 2022년 방송인 백종원오른쪽이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에 잡힌 모습. 최근 이 영상이 뒤늦게 퍼지면서 박씨는 신상 정보가 털리는 등 ‘나락’ 가게 됐다. /유튜브

◇이번 주 나락 당첨자는?

매주 누군가가 나락에 떨어진다. 이번 주에는 10년 전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 중 한 명이 나락 갔다. 실명, 주소, 가족 등이 털리며 나락의 시작을 알렸다. 가해자가 과거에 방송인 백종원의 음식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면이 뒤늦게 포착됐기 때문이다.

그 전주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락 위기는 ‘개통령’으로 불린 강형욱씨에게 찾아왔다. 구직 정보 사이트에서 강씨가 직원에게 갑질을 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나락행 열차가 달려나갔다. 강씨가 과거 강아지 훈련 중 반말을 쓰고 고함을 친 일을 비롯해 그의 ‘관상’까지 문제 삼았다. 일주일 만에 해명 영상을 올리고 나서야 나락은 ‘일시 정지’된 상태다.

강아지 훈련사 강형욱씨가 해명 방송을 하는 모습. /유튜브

강아지 훈련사 강형욱씨가 해명 방송을 하는 모습. /유튜브

나락이 일상이 된 사회를 풍자하는 유튜브 방송 ‘나락퀴즈쇼’도 만들어졌다. 출연자에게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한 발언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다. 그 선택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자를 나락에 보낼 수 있다는 ‘공포’가 재미 요소. 그러나 ‘나락퀴즈쇼’ 제작진도 나락에 갔다. 출연자 성희롱 논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라는 표현을 쓴다. SNS 계정을 구독 취소하듯이 간단하게 한 사람 업적 전체를 묵살하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그런 세태를 풍자한 할리우드 영화 ‘드림 시나리오’가 지난달 국내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나락 퀴즈쇼. /유튜브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나락 퀴즈쇼. /유튜브

◇나락가는 이유는?

나락 가기 쉬운 세상이다. 소통이 빠른 인터넷 세상이라 유명세를 얻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는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주식과 코인의 가격이 이유 없이 올랐다 떨어지는 현상처럼, 도덕적으로 다져지지 않고 갑자기 얻는 명성은 위태롭다”며 “익명성에 기대 누군가를 난도질하며 네티즌 본인의 현실적인 불만을 전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했다. ‘나락 보내기 엔터테인먼트’도 발달한다. 교통사고 현장의 견인차처럼 인터넷에서 ‘나락’ 소재를 쫓아다닌다고 해서 ‘사이버 렉카’로 불린다.

혼자 사는 세상은 한계가 있다. 개그맨 박명수는 지난달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10명 이상이 방송을 만들면 제작진이 같이 보면서 ‘저건 조금 잘못되지 않았나’ 등 서로 의견을 이야기한다”며 “요즘은 1인 미디어가 많다 보니 자기 생각이 옳은 줄 알고 ‘재밌네’ 하며 내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나락 가지 않게 바로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잔소리를 경청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음주 뺑소니 혐의를 받는 가수 김호중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음주 뺑소니 혐의를 받는 가수 김호중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그럼에도 오래 살아남는 사람의 생존 비결은 있다. 몸을 사리고 말을 아끼는 것. 시사 이슈를 다루는 유튜버구독자 약 300만명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해 “비겁하다 욕해도 안 다룬다”고 말한다. 7년간 큰 탈 없이 방송을 진행 중이다. 15년간 인터넷 방송을 하며 구독자 약 150만명을 보유한 한 메타버스 유튜버는 방송에서 “TV 나가서 다른 방송인을 따라 하면 가랑이 찢어져 죽는다”며 “‘이런 거 하는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는 식이라야 오래간다”고 했다.

불교철학을 전공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종철 교수는 “불교적으로는 과거의 잘못인 ‘업’이 많이 쌓여서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라면서도 “원 의미보다는 그냥 ‘안 좋은 일’ 정도로 쓰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교 경전 ‘지장경’에 따르면 나락에 떨어지더라도 노력을 통해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나락naraka를 묘사한 미얀마 그림. /위키피디아

나락naraka를 묘사한 미얀마 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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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욱 기자 musc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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