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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침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엄마의 한맺힌 싸움 [민병래의 사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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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71회 작성일 24-06-0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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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 1987년 카투사에서 의문사한 김용권의 어머니 박명선①

[글쓴이: 민병래작가]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편집자말>

박명선은 30년 넘게 거리에서 싸웠다. 뒤로 아들의 사진이 보인다.
ⓒ 민병래


박명선은 부스스 일어났다. 분명 아들 용권이었다. 모시적삼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제법 살이 오른 모습, 녀석은 뒷문으로 들어와 강의실을 둘러보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손을 들어 용권아라고 불렀으나 어미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아들을 쫓아가려고 용을 썼으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목소리를 높인 탓인가? 목이 칼칼하고 얼굴이 부은 듯하다. 새벽을 알리는 한 줄기 빛이 방안에 스며든다. 방안의 서랍장이며 TV, 냉장고가 때맞춰 기지개를 켠다. 박명선은 문득 아들 묘소를 다녀오고 싶었다. 올해도 지난해도 아들의 기일 2월 20일을 건너뛰고 말았다. 팔순이 넘어가니 힘은 떨어지고 협심증에 신경성 위궤양 등 지니고 산 병이 모두 깊어진 탓이다. 박명선은 묘소에 함께 가줄 아들의 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주섬주섬 전화기를 찾았다.


성북구 정릉의 집을 나선 시간은 오전 10시, 이천의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을 거쳐 서울대학교 교정에도 들를 심산이다. 벚꽃이 벌써 지는지 바람에 흩날린다. 4월의 아침 햇살이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올라타 눈부시다.

운명의 그날

그날 1987년 2월 20일 오전 10시, 검은색의 집 전화가 울렸다.

"용권이 집에 없습니까?"

낯선 목소리는 용권이의 카투사 부대에서 한국군 인사계를 맡고 있는 김 중사였다. 박명선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걸음을 서둘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들은 의정부에 있는 미8군 2공병여단 44공병대대 D중대에서 복무 중이었다. 용권이는 이틀 전 용산에 있는 미8군 121병원 신경과에서 진료를 받고 집에 들렀다가 귀대했다. 그런데 김 중사는 "2월 18일 귀대할 때 정문에서 적는 출입 기록이 없고 오늘 아침까지 부대 안에서 김용권 상병을 본 사람이 없다, 실종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영등포역에서 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분명 부대로 향했다. 그런 용권이가 없어졌다니 대체 무슨 소린가?

박명선은 콩콩대는 가슴을 누르며 내달렸다. 2월의 찬비가 머리를 적신다. 바람마저 세차 목도리 안쪽으로도 한기가 파고들었다. 남편은 계단에서 넘어져 몸져누워 있기에 용권이의 이종사촌 형과 밑의 동생을 불렀다. 가는 내내 박명선은 아들이 환하게 웃으며 기다릴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 시경 도착한 부대에서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전화를 걸었던 인사계 중사는 "10시 50분경 김용권 상병이 자기 방 침대 난간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한미야전사 범죄수사대가 조사를 했고 11시 23분 사망 판정이 내려졌다"라고 말했다. 박명선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인사계의 멱살을 잡고 "이놈아, 바른대로 말해"라며 흔들었다. 10시에 통화할 때만 하더라도 용권이의 막사까지 다 찾아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변사체가 되어 나타났다니 믿을 수 없었다. 박명선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바른대로 말해, 바른대로 말해"라고 외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6군단 헌병대 수사관이 도착해 현장 검증을 하겠다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들의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달려가 아들의 손을 잡으면 녀석이 엄마 왔어?하고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박명선은 차마 현장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용권이가 쓰던 막사 209B호실에 들어가 검증에 참여한 조카는 "용권이가 이층 침대의 난간에 걸린 전깃줄에 목이 맨 채 숨져 있었어요. 1층 침대 쪽으로 무릎을 꿇고 침대 시트에 팔을 기댄 모습으로요"라고 말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명선은 주저앉았다. 아들의 죽음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2층 침대의 난간이 사람 가슴께일 텐데 이 정도 높이에 목을 매 숨지다니? 더군다나 팔꿈치가 닿는 곳에 1층 침대가 있으면 숨이 막힐 때 본능적으로 짚지 않았을까? 그리고 유서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틀 전 집에 다녀갈 때 제대 후 계획을 들려주던 아들, 그런 녀석이 목숨을 끊을 때는 죄송하다는 편지라도 남겼을 것 아닌가? 박명선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흐느끼는 그의 어깨 위로 2월의 찬바람은 사납게 지나가고 겨울 까마귀는 음산한 울음을 뱉어냈다.

"어머니 피곤하지 않으세요?"
"괜찮네, 자네가 아침부터 불려 나와 고생이 많네."

아들 친구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박명선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마운 녀석이다. 아들 기일을 살뜰하게 챙기고 자주 안부 전화를 주었다. 용권이 대신 아들 노릇을 하겠다는 말까지 건네 마음을 훈훈하게 한 녀석이다. "두 시간은 걸릴 테니 한숨 주무세요"라는 말에 박명선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잊어버리려 해도 떨쳐버리려 해도 되살아나는 세월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박명선이 작성한 탄원서. 그는 이런 탄원서와 진정서를 수천 장 썼다.
ⓒ 박명선 제공


박명선은 2월 20일, 밤을 꼬박 새우며 결심했다. 병석에 있는 남편 그리고 아들 셋과 딸 하나, 생활을 꾸려가기에도 버거운 하루하루지만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다음 날부터 증거를 찾아 나섰다. 우선 부대의 출입 기록을 요구했다. 용권이가 귀대한 시간, 그동안 용권이를 면회한 사람이 누구이고 언제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2월 18일 통화에서 인사계는 용권이가 귀대할 때 적어놓은 서명이 없다고 했는데 넘겨받은 출입부에는 20:08에 도착한 것으로 적혀있었다. 용권이가 집에 들렀다 영등포역에서 전철을 탄 게 19시경이다. 그날 아들은 121병원에 들렸다가 집에서 저녁을 먹고 귀댓길에 올랐기에 박명선은 그 시각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출입부에 따르면 영등포역에서 한 시간 만에 의정부의 인디언Indian 캠프에 도착한 것인데 이는 날아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의문은 또 있다. 군부대가 점호를 통해 병사를 관리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 18일 밤에 귀대한 병사가 19일 아침과 저녁 점호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이는 탈영으로 의심되는 상황이다. 부대에 비상이 걸려야 하지 않는가? 더욱이 부대원 대부분이 팀스피릿 훈련에 동원되어 남아 있는 대원은 극소수였으니 인원 점검은 더 쉬웠을 터이다.

미8군의 육군 소장인 에이치엘 참모장은 "2월 19일 07:30분 점호 시에 안 보여 121병원에 간 줄 알았다. 그런데 2월 20일 07:30분 점호 시에도 안 보여 121병원 입원과에 전화를 했다. 지정진료 날 외에 김용권 상병이 오지 않았다고 해 영내를 철저히 수색했고 10시 50분에 비상 열쇠로 김 상병의 방문을 열어 사체를 발견했다"라고 경위를 설명했다.

박명선은 이 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사가 상급자의 허락 없이 병원 진료를 받으러 영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병사가 안 보이는데 "병원 갔나 보지" 이런 정도로 느슨하게 판단한다? 아무리 카투사의 한국군 군기가 느슨하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박명선은 아들이 먹던 약 봉지를 받아보고 또 한 번 놀랐다. 121병원에서 처방받은 알약 15정과 가루약 5봉 중에 알약은 12정, 가루약은 4봉이 남아 있었다. 밥을 먹고 약을 먹었을 테니 정상적으로 식사를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영내 식당에서 밥을 먹었을 터인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의 행적은 파고들면 들수록 의문투성이였다.

박명선은 보안사에서 근무하는 사돈 집안의 추 상사를 의심했다. 그는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을 한 아들의 정보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1986년 8월 3일에는 자신이 근무하는 208보안부대로 면회 오게끔 아들을 유인했다. 아들이 카투사에 근무하는 만큼 보안사에서 마음대로 연행할 수 없는 사정이 작용했을 터이다. 그때 아들은 208보안부대에서 서울대 민민투 수배자의 행방을 추궁당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박명선은 그 일을 떠올리며 아들의 죽음이 보안사와 관련이 있을 거라 의심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용권 사건이 발생하자 몹시 긴장했다. 1987년 1월 14일 김용권이 죽기 한 달여 전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다. 2월 7일에는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박종철 추도회가 열렸고 49재에 맞춰 3월 3일에는 진상규명을 위한 대규모 가두행진이 예정되어 있었다. 박종철의 죽음으로 위기에 처한 때, 김용권의 죽음이 자칫 정권 퇴진 투쟁의 거대한 풀무가 될까 봐 크게 당황한 것이다.

제6군단 헌병대는 부검을 서둘렀다. 사고 다음 날인 2월 21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부검을 시도했다. 박명선은 진상규명이 먼저라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헌병대는 2월 25일 6군단 군법회의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부검을 시도했다. 박명선은 이를 재차 거부하고 "미군 군의관이 부검하고, 우리가 요구하는 변호사를 선임해 입회하게 해달라"라고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부검은 2월 27일 121병원 병리 실험실에서 제6군단 우종대 검찰관, 김상철·조상현 변호사, 미 대사관 2등 서기관 할비쿠, 김용권의 백부와 6촌 형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121병원 군의관 와이코프 소령은 17시 20분에서 20시 30분까지 진행된 부검 후 "목이 졸린 흔적 이외에 외부로부터 구타나 상처를 입은 흔적이 없다. 모든 장기에서 사인이 될 만한 질병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이 목을 매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결과를 밝혔다.

무릎이 땅에 닿아 체중이 실리지 않은 채 목이 졸릴 수 있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법의학교과서를 보면 몸이 지면에 닿은 상태로 숨진 사례가 많다, 김용권의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라며 문제 제기를 일축했다. 또 어딘가에서 살해되어 영내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흔적도 없다며 사건의 종결처리가 마땅하다고 했다. 이런 결론을 내고 미8군 공병단은 장례식을 서둘렀고 정부는 이 부검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언론도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동아일보> 는 2월 28일 "숨진 카투사 자살로 판정"이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경향신문> 은 한술 더 떠 "당국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라며 신변을 비관한 자살로 몰고 갔다.

한편 박명선의 진정을 통해 김용권의 죽음을 접한 종교계와 민주화운동세력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박종철에 이은 또 한 청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고문폭력대책위원장 김상근 목사와 김동완 목사 등이 주도하여 김용권군 사망사건 진상규명소위윈회가 만들어졌다. 위원회는 2월 25일 "김용권에게 민민투관련 수배자의 행방을 추궁했는지, 이를 위해 고문을 했는지"를 밝히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요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외려 탄압으로 나왔다. 동대문경찰서는 부검 당일인 2월 27일 기독교회관을 압수수색하고 2월 28일에는 "허위 소문을 유포한다"는 명목으로 김상근 목사를 연행했다. 김동완 목사도 3월 3일 성동경찰서로 붙잡혀갔다. 두 목사의 연행과 구류 처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자 30여 명이 항의 농성에 들어가고 일반 신도도 성명을 발표하면서 싸움에 동참했다. 이렇게 불씨가 커지자 문공부 장관 이웅희는 직접 나서 "젊은 병사의 죽음은 애석하나 시중의 풍문은 허무맹랑한 낭설"이라고 말하며 사태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미국기독교협의회를 비롯해 세계기독교협의회까지 전두환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며 파장은 점차 커져갔다.

어려운 가정 돌보던 듬직한 아들이었는데
김용권이 대학 2학년 때 찍은 사진. 군입대 전 찍은 사진이다.
ⓒ 박명선 제공

김용권이 군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 박명선 제공



이때 박명선은 청와대 관련 일을 하는 종조카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는 "고모, 산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땅을 찾아 들어가야 해요"라고 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된 전화는 설득이 아닌 종용이었다. 미8군 병원 영안실에 방치되어 있는 아들의 시신이 못내 걸렸던 박명선은 일단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3월 8일 매장 동의서에 서명하고 3월 9일 미8군 종교휴양소에서 영결식을 치렀다. 고양군 벽제읍 용미리 시립공원묘지에 아들을 묻고 돌아오면서 박명선은 "이게 끝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다 잡았다.

정릉에서 출발한 박명선 일행의 차는 내부순환도로와 북부간선을 거쳐 중부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차창으로 봄날 아침이 눈부시게 밀려든다. 도로에 잇닿아 있는 나지막한 산에 신록은 싱그럽고 개나리가 진 자리엔 철쭉이 폈는지 분홍 빛이 요란하다. 박명선은 아침에 서둘러 정한 발걸음인지라 간단하게 술상을 봤다. 마음 같아선 용권이가 좋아한 시루떡을 가져 가고 싶었으나 오징어포에 막걸리 한 통 사과와 배 한 알만 챙겼다. 따스한 햇볕 탓인가 봄날의 산 빛깔에 마음을 뺏기던 박명선의 눈은 다시 감긴다.

봉래동의 양정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도서관에서 언제나 마지막으로 나왔다. 학교에서는 아예 아들에게 도서관 열쇠를 맡겼다. 늦은 밤 아들이 집에 돌아오면 부침개를 부치고 콜라를 내놨다. 용권이는 남동생 둘과 함께 꿀떡꿀떡 삼켰다. 박명선은 "우리 같이 없는 집에서 대학생이 나오면 반칙이다"라고 한탄하면서도 전교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아들을 뒷받침하고 싶었다. 동생들에게도 형은 자랑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일등 성적을 받아오면 용권이의 친구네가 하는 식당 동남정에서 불고기를 사 먹였다. 무쇠도 소화시킬 중고생에게 식당 1인분이 간에 기별이나 갔겠는가, 몇 점 집으면 끝이지만 그날은 축제였다

용권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동생들 공부도 돌봤다. 초등학교만 나온 박명선은 숙제를 챙기기가 진즉부터 힘들었던 터, 녀석이 어미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이 뿐인가? 남편은 젊어서부터 전당포에서 처분하는 시계를 받아다 파는 일을 했다. 어쩌다 목돈이 들어오면 술도 한잔 걸치게 마련, 종종 시경에서 연락이 왔다. "댁의 아저씨가 술에 취해 보호 중이니 모셔가세요"라고. 그러면 아들은 둘째와 함께 가 아버지를 택시에 태워 골목 입구에서 업고 들어오곤 했다.

그런 아들의 죽음이 원통해 박명선은 아들을 묻고 온 후 어디든 달려갔다. 자살 판정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의정부 미군 부대에 가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정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버티다 미군 헌병에게 번쩍 들리기 일쑤였다. 국방부 청사에도 쫓아가 장관을 만나겠다고 소리쳤다. 그의 손에 담요와 냄비, 쌀이 들려있었다. 만나주지 않으면 거리에서 밥을 지어 먹으며 농성할 작정이었다.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에도 찾아가 우리 아들의 죽음도 무겁게 다뤄달라고 애원했다.

그렇게 거리를 헤매며 박명선의 몸과 마음은 무너졌다. 국방부에 갔다가 돌아오는 어느 날 가슴이 쪼였다. 두드리고 어루만져 괜찮은가 싶었는데 통증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더니 밤이 되어서는 마치 수건을 짜듯 심장을 비트는 손길이 느껴졌다.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을 부여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집안의 모든 진통제를 털어 넣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거리를 헤매다 주저앉곤 했다. 발을 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쓰러져 눕기 바빴다. 협심증이었다.

전두환 정권에게 박명선의 협심증은 안중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나중에는 골목 앞뒤로 전경 두 명을 배치해 출입을 감시했다. 전화는 도청되고 영등포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가 수시로 문을 두드렸다. 나가라고 소리쳐도 인사나 드릴 겸 찾아왔다며 발을 들이밀었다. 박명선은 마당에 있는 구정물을 끼얹으며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미행까지 했다. 버스를 타건 지하철을 타건 대놓고 따라붙었다.

박명선은 경찰을 따돌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문이 닫히기 직전 몸을 던지듯 내려 경찰을 떨어냈다. 그렇게 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찾아가고 박종철 대책위를 찾아갔다. 경찰은 막내의 학교까지 찾아가 동정을 살폈다. 박명선은 막내를 찾아간 형사의 멱살을 잡고 이놈이 잘못되면 네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머니, 저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어요"라는 느물거리는 답변이었다.

- 2편 lt; 서울대 용권이 나무, 엄마는 아직 답을 못 들었다 gt;https://omn.kr/28upr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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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① 제6군단 헌병대 수사관은 침대 높이에 대해 1.2M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1.5M라고 정정했다. 미군 측은 박명선이 이 점을 문제 제기하자 최종적으로 1.385M로 확인해 줬다. 서울신문은 2.6M라고 보도했는데 이것이 의혹을 더 키웠다.
② 208부대의 추 상사는 박명선의 형부에게 7촌 조카가 된다. 박명선에게 사돈이 되는 셈이다. 박명선이 대구로 시집간 언니의 살림을 맡은 시절이 있는데 이때 추 상사가 경북고등학교에 다니며 언니집과 앞뒷집에 살아 잦은 내왕이 있었다. 김용권이 카투사 공병부대 근무를 힘들어 하자 박명선은 208보안부대로 가기 전 보안사의 보안교육대에서 근무하던 추 상사에게 김용권의 보직 변경을 상의한 적이 있던 터라 김용권은 먼 사돈인 추 상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③ 1987년 2월 27일 진행된 부검은 제6군단 보통군법회의 검찰관 중위 우종대의 지휘 아래 제6군단 헌병대 준위 이영치, 박명선이 선임한 김상철·조상현 변호사, 미 대사관 2등 서기관 할비쿠, 미 8군 범죄수사대 준위 스트위스, 육군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과장 양우익 대위 그리고 김용권의 백부 김만두, 6촌 형 김용환이 참석했다. 121병원 법의학 군의관 와이코프 소령이 진행했다.
④ 김용권군 사망사건 진상규명소위윈회가 ‘소위원회’라고 한 것은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 산하에 꾸려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데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상규명위원회 조종주 사무처장, 기록단 김문수 위원,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 단체 연대회의 이형숙 사무처장님의 도움 말씀과 감수가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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