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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앞두고 떠오른 얼굴…사망신고서 내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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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61회 작성일 24-02-0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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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렇게 가실 줄은 몰랐네... 아들의 시대

[라인권 기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설 앞두고 떠오른 얼굴…사망신고서 내던 날
▲ 증조부 산소 증조부께서는 조실부모한 손자 아버님을 키우셨다.
ⓒ 라인권


"다 됐습니다. 가셔도 됩니다."

아버지의 사망신고서를 받은 공무원이 제법 긴 시간을 꼼꼼히 살피다 몇 가지를 보강한 후에 얼굴을 들고 나를 보며 무심히 한 말입니다. 그 말에 씁쓸한 가슴으로 나와 차에 오르자 가슴 한 켠에 서러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망연자실이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있었던 날이 어느덧 십오년이 지났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날 아침 그렇게 가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은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이면 항상 추위가 오지만 그날은 초겨울 강추위가 밀려왔었습니다. 그날 새벽기도를 하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당신 방 화장실 문 앞에 앉아 계셨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셨다 나오셔서 방에 들어갈 기력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를 끌다시피 침대에 올려 드리고는 곧장 내 방으로 와 씻고 교회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이상하다고 다급히 부르는 아내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넥타이를 매다 말고 가보니 아버지를 안고 있던 아내가 "돌아가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며느리 품에서 임종하셨고, 저는 아버지를 위한 임종 기도를 올렸습니다.

구급차가 도착해 모시고 나가는데 신발이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절차를 따라서 장례식장으로 모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고, 은혜롭게 장례를 모시고 있었지만, 삼십 년 넘은 목양 생활에 아버지 장지 하나를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참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괴로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유골을 조실부모하신 아버님을 기른 증조부님 곁에 모셨습니다.
▲ 아버님 산소 아버님을 기르신 증조부 앞에 아버님을 모시고 주목 한 그루를 심었다.
ⓒ 라인권


장례를 마치고 두 주일을 보낸 후에 서류를 챙겨서 본적지로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러 갔습니다. 가까운 곳에 사는 동생도 있지만, 장자인 제 손으로 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세상에 오게 했고 그분의 손으로 제 출생신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손에 자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 세상에서 마지막 절차를 제 손으로 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저를 이 땅에 오게 하고 이 세상을 한 공인으로 살게 하신 은공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사망신고란 한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법적 공인이며, 이 세상에서의 부재를 공식화하고, 한 개인의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날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마른 잎들이 차창을 때리며 흩날렸습니다. 찬바람에 낙엽이 휘날리는 하늘은 잿빛이었습니다.

면사무소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창구에 서류를 내밀자, 창구 직원이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가리킨 곳으로 찾아가 용무를 말하고 서류를 내밀자, 그 직원은 앉으라고 하고 찬찬히 서류를 점검하며 몇 군데를 수정 보강한 후에 나를 보더니 단 한마디를 했던 겁니다. "다 됐습니다. 가셔도 됩니다."

조금은 뜻밖이었습니다. 한 사람, 아니 한 가정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처리하는 것이라 헛인사라도 있을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장수하셨네요. 섭섭하시지요?이런 인사말이라도 건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무원의 사무적인 말에 비로소 내가 위로받고 싶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내게 더 이상 이 세상에 아버지가 안 계시고 아버지 없는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 깨달았습니다.

흔들리는 발걸음
▲ 양친 93세 어버이날 동해안에서, 이 사진이 아버님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 라인권


면사무소를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흔들렸습니다. 흔들리는 걸음을 바로 하며 걸어 나와 차 옆에 서자 추수가 끝나고 비인 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텅 빈 논처럼 휑한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모실 때에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슬픔과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가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가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마치 언제나 계실 것과 같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가고 있지만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언제나 곁에 계실 것 같이 여기는 것이 자식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가신다고 생각했다면 그날 아침 그렇게 침대에 끌어 올려 드리자마자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제 사무를 보러 돌아서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십 오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켠이 저립니다.

밤이 깊습니다. 창밖에서 바람에 낙엽 구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꼭 이때쯤입니다. 어린 저를 데리고 뒷산에 가시더니 톱으로 소나무를 잘라서 낫으로 팽이를 깎아 주시던 아버님 생각이 납니다. 정월이 오면 대나무를 손질하셔서 한지로 방패연을 만들어 주시던 아버님이 그립습니다.

▲ 삼대 삼대가 어머님 생신에 설악산에서의 한때, 제가 아버지 사망신고서를 낸 것 같이 가정을 이룬 저 아가들이 나의 사망신고서를 내야 할 것이다.
ⓒ 라인권


겨울밤이 깊습니다. 깊어가는 겨울밤만큼 그리운 마음도 깊어지고 후회도 깊어집니다. 아버님은 저를 세상에 오게 하시고 그 손으로 제 출생신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자기 손으로 아버지의 사망신고서를 내고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시대는 가고 지금은 아들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제 얼마의 세월이 더 가면 제가 아버지 사망신고서를 낸 것 같이 제 아들이 제 사망신고서를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다시 아버지를 만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가고 오지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다시 분리가 없이 함께 있게 되고, 서로를 온전히 알고 이해하며 사랑하게 될 것을 압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 사망신고서를 내던 날, 내게 던진 무심한 공무원의 인사말 "다 됐습니다. 가셔도 됩니다"는 아주 상징적인 인사말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야 할 그날에 이 말처럼 여 한없이 갈 수 있고, 후회 없이 보내는 인사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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