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A 씨가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A 씨는 과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의대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4.5.8/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서울 강남역 한복판에서 명문대 의대생이 자기 연인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여기에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이 재조명받고 있다.
그러나 이별 통보에 연인을 살해했다는 소식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남편이나 애인 등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사건은 최소 138건이다. 같은 기간 데이트 폭력교제 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는 1만3939명에 이른다. 수능 만점을 받은 의대생이라는 사실이 부각돼야 새로운 뉴스가 될 정도로 데이트 폭력 문제가 만연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헤어지자는 말에 계획된 교제 살인
9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서초경찰서는 지난 6일 서초구 서초동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여자 친구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한 혐의로 최 모 씨25를 긴급 체포했다. 최 씨는 "헤어지자는 말에 범행을 저질렀다"며 자신의 혐의를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최 씨가 경기도 화성시 동탄동에 위치한 대형마트에서 사전에 흉기를 구매한 정황이 확인됐으며, 최 씨 변호인은 계획범죄가 맞다고 인정했다.
경찰은 아직 구체적인 사건 경위를 조사 중이지만, 사건 정황과 최 씨 진술을 놓고 봤을 때 데이트 폭력 범죄, 교제 살인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A 씨가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A 씨는 과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의대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4.5.8/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지난해 데이트폭력 가해자 1만3939명…"최소 138명 살해"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데이트 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는 1만 3939명이다. 2020년 8951명 대비 55.7% 증가했다. 데이트 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교제 살인에 대한 정부 공식 통계는 없지만,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된 사건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최소 138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김레아26가 이별을 통보한 여자 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까지 중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다. 검찰은 교제 관계에서 살인으로 이어진 위험성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신상 공개를 결정했다. 올해 1월 특정중대범죄 신상공개법 시행 이후 첫 사례다.
데이트 폭력을 신고한 연인을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 5월 김 모 씨33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 상가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을 데이트 폭력으로 신고한 전 연인을 흉기로 살해했다. 같은 달 경기도 안산에서는 한 남성이 헤어진 여자 친구를 스토킹하던 중 목을 졸라 살해했다.
데이트 폭력 특성상 드러나지 않은 실제 사건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가 발간한 치안 전망 2024 보고서는 "교제 폭력은 친밀한 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폭력 행위라는 점에서 당사자 간 교제 폭력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상대방의 폭력 행사를 수인하는 경우도 상당수 발생한다"며 "이에 따라 교제 폭력 행위가 신고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상당 부분 암수 범죄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짚었다.
보고서는 검거 인원수가 2020년 이후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 주목하며 올해도 데이트 폭력 건수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데이트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직후 연인을 살해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보복살인 혐의를 받는 김모씨가 1일 서울금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2023.6.1/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법의 빈틈 파고든 폭력…"결국 데이트폭력 대하는 사회 문제"
전문가들은 관련 법의 부재, 약한 처벌 수위가 데이트 폭력이 늘어나는 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데이트 폭력은 강력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접근 금지 조치 등을 할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다. 가정폭력범죄나 스토킹 범죄가 관련 법에 따라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과 대조적이다. 데이트 폭력을 범죄로 규정한 법안들은 수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데이트 폭력으로 구속 수사를 받는 피의자 비율도 수년째 1~2%대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 데이트 폭력 가해자 1만 3939명 중 구속 수사를 받은 인원은 2.22% 수준인 310명에 불과하다.
성범죄 전문 이은의 변호사는 "법도 결국 사회 분위기와 문화의 결과다. 데이트 폭력이 개인의 일로 치부되고 화나서 우발적으로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인식되기 때문에 법안 상정과 폐기를 반복하는 것"이라며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해야 법과 정책,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할 거고 분풀이식 담론으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같은 얘기를 쳇바퀴처럼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교육의 부재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이 변호사는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대한 예의나 헤어질 때 상대와 어떻게 소통하고 감정을 처리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며 "국영수 중심 입시에 열을 내지만 관계성에 대한 교육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만들고 있는지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 이번 사건이 기존 교제 사건과는 결이 달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 씨의 범죄 전력이나 연인 폭행 신고 접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데이트 폭력 등 사전 징후 없이 곧바로 살인으로 이어진 특이 사례라는 얘기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곧바로 살인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범죄 예측도 어렵고 분리 조치 등 법으로 예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연인을 인격체로 대하기보단 소유물로 인식하는 잘못된 생각이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K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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