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거나 쟁점이 되는 예민한 현안을 점검하는 고정물입니다. 확인·점검 사항 목록인 체크리스트를 만들 듯, 우리 사회의 과제들을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편집자 주]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구 현대아파트 경비실에 경비원 배치현황이 게시 돼 있다. 2018.1.5/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서울=뉴스1 홍유진 기자 =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아파트에서 입주민 소유의 벤츠를 대리주차 해주던 70대 경비원이 차량 12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차주와 경비원은 분명한 급발진이었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한 상황인데요. 재판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는 만큼 당장 떠안아야 하는 수리비 부담만 수 억대입니다.
급발진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경비원 대리주차가 불법인 탓에 보험 적용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날 왜 경비원은 불법을 무릅쓰고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사고 이면에 있는 경비원들의 속사정을 알아봤습니다.
◇급발진 미인정 시 전부 경비원 책임
지난 2일 사고를 낸 경비원 안 모 씨77와 차주 이 모 씨63 측은 기자회견을 열고 "사고 차량 제조사인 벤츠 독일 본사와 수입한 벤츠코리아, 그리고 판매한 한성자동차 세 곳을 상대로 다음 주쯤 민사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안 씨는 지난 22일 오전 7시 50분쯤 이중주차 돼 있던 입주민 소유 벤츠 승용차를 빼기 위해 운전하던 중 주차돼 있던 차량 7대를 후진하며 들이받았고, 이후 다시 직진하는 과정에서 5대를 추가로 들이받았습니다.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에는 브레이크 등이 들어왔음에도 차가 멈추지 않고 앞뒤로 왔다 갔다 돌진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당시 차량에서 윙윙하는 굉음이 났으며 이를 목격한 주민이 있다는 점도 급발진이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안 씨는 "차주한테 1층에서 차 키를 받아 주차하려고 브레이크를 꼭 밟고 살살 운전하는 순간 차가 뒤로 가더니 쏜살같이 쾅쾅하더니 도망가듯이 여러 대를 들이받고 멈췄다"며 "틀림없는 급발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차가 12대나 박았으니 누가 책임지겠냐"며 "직장도 못 다니고 너무 억울하니 철저히 조사해달라"고 울먹였습니다.
하지만 급발진 입증 책임이 차량을 만든 제조사가 아닌 소비자에게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전망입니다. 아직 국내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해 대법원까지 최종 승소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나마 2018년 호남고속도로에서 발생한 BMW 급발진 의심 사건이 항소심에서 급발진을 인정받았지만, 아직 대법원 판단을 남겨두고 있죠.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구 현대아파트 경비실에 주민들이 맡겨 놓은 차키가 빼곡히 걸려있다. 구 현대아파트가 최저임금 인상 등의 이유를 들어 아파트 경비원 전원에게 해고 통보를 내렸다. 2018.1.5/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불법된 지 3년 지났지만…대리주차 여전
입주민이 경비원에게 주차를 시키는 것은 명백한 불법입니다. 2021년 10월 21일부터 시행된 공동주택관리법은 경비원에게 고유의 경비 업무 외에 개인차량 대리주차나 택배물품 세대 배달 등의 일을 시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최대 10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리주차를 꼭 시켜야 한다면 경비업법상 경비원이 아닌 일반 관리원으로 고용하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경비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수당까지 제공해야 하므로 돈이 훨씬 많이 듭니다.
근로기준법상 경비원들은 감시적 근로자로 돼 있는데요. 감시적 근로자란 감시 업무를 주로 하기 때문에 노동강도가 적어 육체적 피로가 크지 않은 직종을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주휴수당, 연장·휴일근로 수당, 휴게 시간 등을 지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과거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는 휴게시간 대기도 근무인지를 둘러싸고 법적 공방이 일기도 했습니다.
결국 경비원들이 불법 대리주차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문제는 고용 계약 특성상 부당한 업무를 지시받더라도 이를 거부하기 힘든 구조라는 점입니다.
가장 먼저 초단기 쪼개기 계약이 문제로 지적됩니다. 대다수 경비원들이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년 단위로 계약을 맺는 탓에 항의했다가는 밥줄부터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실제로 2019년 아파트 경비노동자 고용안정을 위한 조사연구 및 노사관계 지원사업 공동사업단이 발간한 전국 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 조사 보고서를 보면, 경비원 94%가 1년 이하 단기 계약을 맺고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경비업에 종사하는 이들 대부분이 60~70대 고령자라서 가능한 일입니다. 기간제법은 한 회사에서 기간제 근로자를 2년 넘게 쓰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는데요. 이때 55세 이상 고령자는 예외입니다. 2년이 넘어가도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초단기 계약만 반복되는 것이죠.
피라미드식 원청과 하청 구조도 문제입니다. 이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건 아파트 관리소장이지만 같은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갑질이나 부당한 지시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아파트에서는 대리주차하다 사고가 날 경우 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써 붙여놓기도 하지만 일방적인 고지는 법적 효력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구 현대아파트 경비실에 경비원 휴게시간 안내문이 게시 돼 있다. 구 현대아파트가 최저임금 인상 등의 이유를 들어 아파트 경비원 전원에게 해고 통보를 내렸다. 2018.1.5/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과거 경비원이 배상 책임을 물게 된 사례는 비일비재합니다. 2021년 용산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이중 주차된 입주민의 외제차를 빼주다가 발생한 사고에서 법원은 입주자대표회의와 경비원이 28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2019년 용산구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 발생한 대리주차 사고와 관련, 한 보험사가 경비원을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도 법원은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피해 차량의 수리비를 지급한 보험사에 경비원이 돈을 물어주라는 것입니다.
임득균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대리주차가 불법이 된 지 벌써 3년째이지만 주차난이 해결되지 않다 보니 아직도 현장에서 부당한 업무지시는 계속되는 실정"이라며 "문제가 생기면 경비원이 온전히 고통받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용역업체의 초단기 계약을 근절하고, 이중 계약 구조 속 불안정한 지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cym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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