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길이 된 서울 마포구의 한 골목길에서 시민들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2022.12.28/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임윤지 기자 = 만둣집에서 만두를 사 먹고 나오는 길에 가게 앞 빙판에서 넘어졌다. 책임은 다음 중 누구에게 있을까. ①주의하지 않은 손님 ②빙판을 치우지 않은 가게 주인 ③만둣집과 보험 계약을 맺은 보험사 ④집에서 자고 있던 만둣집 건물주.
정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주인이 제설 작업을 하는 등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사고가 났으면 손님의 책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눈을 치우지 않았다면 주인 책임이 될 수 있다. 건물주에게도 시설물 관리 책임이 있다. 모두가 책임을 나눠 가질 수 있다. 법적인 배상 책임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겨울철 빙판길 안전사고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법정에서는 책임 주체를 놓고 연일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위험의 예측 가능성과 관리 소홀 여부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 내 집 앞 눈 치우기 책임은 있지만 강제성은 없어
제설 및 제빙의 책임 근거는 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재난안전법과 자연재해대책법 등에 명시돼 있다.
우선 국가와 지자체는 재난안전법에 따라 재난이나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모든 행정력이 내 집 앞이나 가게까지 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에 같은 법 5조에는 국민의 책무가 명시돼 있다. "자기가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건물·시설 등으로부터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연재해대책법 27조에 따르면 건축물 소유자·점유자 또는 관리자로서 관리 책임이 있는 자는 건축물 주변 보도, 이면도로, 보행자 전용도로, 시설물 지붕의 제설·제빙 작업을 해야 한다. 구체적인 책임 범위는 지자체 조례로 정하게 돼 있다.
이에 따라 지자체들은 이른바 내 집·내 점포 앞 눈 치우기 조례를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어 서울시 건축물 관리자의 제설·제빙에 관한 조례의 경우 제설·제빙 책임 순위를 △소유자가 건축물 내 거주하는 경우 소유자·점유자 및 관리자 순 △소유자가 건축물 내 거주하지 않는 경우 점유자·관리자 및 소유자 순으로 정하고 있다. 건물주가 해당 건물에 살지 않으면 세입자나 관리자의 책임이 앞서고 반대의 경우 건물주의 책임이 우선시된다. 이들의 책임 순위를 합의해 정할 수도 있다.
범위는 주거용 건축물의 경우 건축물 주 출입구 부분 대지경계선으로부터 1m까지, 비주거용 건축물은 건축물 대지경계선으로부터 1m까지 눈이나 빙판을 치워야 한다. 건축물과 접한 보도나 시설물 지붕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 같은 법과 조례에 벌칙 규정이 없어 지키지 않아도 벌금이나 과태료를 물지 않는다. 책임은 명시돼 있지만 강제성은 없다는 얘기다. 소방방재청이 2010년 내 집·내 점포 앞 눈 치우기를 지키지 않으면 최대 100만원의 과태료를 물리는 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반대 여론에 무산됐다.
미국은 주에 따라 적게는 25달러에서 많게는 500달러, 영국은 최대 2000파운드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캐나다도 지자체별 벌금 규정이 있으며 토론토에서는 과태료 105달러를 내야 한다. 독일도 지자체별 벌금이 있다.
서울 안국역 인근에서 시민들이 빙판길을 조심히 걸어 출근하고 있다. 2024.1.8/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 손배소 판결 제각각…"예측 가능성 관건"
국내에서는 형사상 책임은 지지 않지만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은 질 수 있다.
책임의 주체는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양태정 법무법인 광야 변호사는 "빙판 때문에 넘어진 장소가 도로라면 국가나 지자체에 책임을 묻고 개인 땅이라면 소유자에게 책임을 물을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도로나 공공시설 내 빙판길에서 미끄러졌다면 국가배상법에 따라 국가나 지자체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단, 설치 및 관리 하자가 인정돼야 한다. 해당 법 5조는 도로·하천, 공공 영조물의 설치나 관리 하자로 손해가 발생하면 국가나 지자체가 손해를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004년 3월 충청 지역에서 폭설로 12~24시간 고속도로에 갇힌 차량 탑승자 244명은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200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법원은 고립 시간에 따라 1인당 35만~60만원을 배상하도록 했다. 고속도로의 관리상 하자로 고립 사건이 발생했다고 인정했다.
당시 법원은 "교통정체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고 즉시 차량의 추가 진입을 통제하는 등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안일한 태도로 고립 사태를 야기했다"고 밝혔다.
리조트나 놀이시설, 아파트, 상가에서 사고가 났으면 해당 시설물 소유자나 관리자가 책임을 질 수 있다. 또 관리자에 대한 영업배상책임보험 계약을 맺은 보험사가 배상 책임을 질 수도 있다.
2012년 2월 경기 안산시의 한 만둣집 앞 빙판에서 넘어진 임모씨는 가게가 인도로 물을 흘려보내 빙판이 생겼는데 제거하지 않아 다쳤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서울중앙지법은 2014년 만둣집 주인과 보험사가 26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단, 임씨 역시 주의하지 않은 책임이 일부 있다며 만둣가게 측 책임을 50%로 제한했다.
관건은 예측 가능성과 관리 소홀 여부 등이다. 양 변호사는 "눈이나 빙판을 내버려뒀을 경우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점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인지가 중요하다"며 "사람이 다닐 것으로 예상하기 어렵고 갑작스러운 한파로 빙판이 생기는 등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고가 났다면 첨예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짚었다.
2018년 전북 한 아파트 도로 빙판에서 넘어진 A씨는 제빙 작업 소홀을 이유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전주지법은 "강설 및 결빙은 자연현상으로서 위험성이나 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워 완전무결한 상태를 유지할 정도의 안전성을 요구할 수 없다"며 일반적인 수준의 제설·제빙이 이뤄졌다고 판단해 원고 패소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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