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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차라리 걸어갈래요" 아이들 울리는 노란버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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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7회 작성일 23-09-1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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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초등 체험학습 줄취소
노란버스법 후폭풍

이달 초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6학년 교실이 눈물바다가 됐다. 담임 교사가 “타고 갈 전세버스를 못 구해 졸업 여행을 갈 수 없게 됐다”고 알리면서다. 학교 밖으로 나가는 체험학습은 모든 학년에서 취소됐다. 학교 측은 “학교로 찾아오는 마술 공연 등으로 대체하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아쉬움을 달래지 못하고 있다.

마포의 초등 4학년 교실에서도 같은 이유로 체험학습이 취소되자, 학생들이 “그냥 걸어가면 안 돼요? 우리 몇 시간이든 걸을 수 있어요”라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경기도의 한 학부모는 “우리 학교는 아이들에게 상처 줄까 고민됐는지 부모들에게만 취소 방침을 귀띔했다. 가을 소풍 간다고 도시락 통도 새로 사뒀는데, 딸한테는 며칠째 말도 못 꺼내고 속앓이 중”이라고 했다.

요즘 전국 초등학교마다 소풍·체험학습·진로탐방·수학여행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일명 ‘노란버스법法’ 후폭풍이다. 노란버스는 13세 미만 어린이 전용 통학버스를 말한다. 원래 장거리 통학에 이용되는 일부 사립학교나 특수학교 등의 스쿨버스, 유치원과 학원 차량 등에 의무화됐는데, 1년에 2~3번 가는 체험학습에도 노란버스만 이용하도록 정부 방침이 바뀌었다. 그러나 현장에선 그 수요를 맞춰줄 노란버스가 턱없이 부족하다. 학창 시절 소중한 추억인 소풍 등을 아예 포기하는 결정이 속출하는 것이다.

법제처가 내린 유권해석이 이 사태의 발단이다. 법제처는 지난해 10월 ‘교육과정 목적으로 이뤄지는 비상시적 현장 체험학습을 위한 어린이의 이동’에 이용되는 교통수단도 도로교통법 제2조 제23호에 따른 어린이 통학 등에 관한 규정, 즉 노란버스법을 적용받는다고 해석했다. 이에 따라 지난 7월 경찰청은 ‘소풍 등 비정기적 운행 차도 어린이 통학버스 신고 대상에 포함되며, 위반 시 과태료를 물리겠다’는 공문을 교육부에 보냈고, 교육부는 각 시·도 교육청에 이런 지침을 전달했다.

노란버스는 차체를 노랗게 도색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어린이 체형에 맞는 좌석과 안전벨트를 설치하고, 비상시 개방 가능한 창문과 경광등, 하차 확인 시스템 등을 갖춰야 한다. 최고속도 제한이 있고 주변 차량의 서행·정지 의무 등 도로상 여러 특권도 누릴 수 있다. 어린이 교통 안전을 빈틈없이 확대한다는 점에서, 특히 고속도로를 달리는 소풍 차량을 노란 버스로 바꾸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노란버스의 기원은 미국에서 1939년 제각각이던 스쿨버스를 노란색으로 통일하고 관련 법을 정비한 것이다. 땅이 넓은 미국은 모든 유치원과 초·중·고교가 스쿨버스를 의무적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스쿨버스가 공교육 인프라에 포함된다. 미국이라면 학교 전용 노란버스를 활용해 단체 여행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스쿨버스 자체가 드문 한국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지난해 5월 대구 달서구 테마파크 이월드 주차장에 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학생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빼곡히 주차돼 있다. 올 하반기부턴 초등생이나 유치원생 체험학습에 노란색 통학버스 대신 일반 관광 전세버스를 이용하면 위법이 된다. /뉴스1

지난해 5월 대구 달서구 테마파크 이월드 주차장에 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학생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빼곡히 주차돼 있다. 올 하반기부턴 초등생이나 유치원생 체험학습에 노란색 통학버스 대신 일반 관광 전세버스를 이용하면 위법이 된다. /뉴스1

당장 일선 학교들은 비상이 걸렸다. 노란버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여서다. 어린이 체험학습에 필요한 45인승 대형 버스는 연간 5만여 대로 추산되지만, 현재 전국에 등록된 ‘합법적’ 노란버스는 수요의 14%에도 못 미치는 6955대뿐이다. 그나마 사립학교·특수학교 등과 장기계약된 차량들이라 다른 학교 소풍에 전용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세버스 업계는 “기존 차량을 노란버스로 개조하려면 1대당 1000만원까지 든다. 그렇게 고쳐 놓는다고 해도 그 버스를 평소 어디에 쓰겠느냐”며 난색을 표한다.

학교들은 9~10월 소풍철을 앞두고 일반 관광버스 전세부터 체험학습 업체와 숙박시설 등에 단체 계약을 수개월 전에 했다가, 지금 위약금을 물어가며 줄줄이 취소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맞이하려 시설과 물품, 인력을 준비했던 지역별 업체들도 울상이다. 경주와 제주도, 속리산 등 수학여행 명소들도 비상이 걸렸다. 업계 추산으론 올해 노란버스법 후폭풍으로 민간이 떠안게 될 피해 규모가 최소 800억원대라고 한다. “노란버스법은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탁상 행정”이란 목소리가 곳곳서 터져나왔다.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는 지난 8월 말 노란버스법 집행을 올 연말까지 한시 유예키로 하고, 노란버스로 개조하는 대신 ‘어린이가 탔다’는 표지만 달아도 일반 관광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학교들은 “단속 안 한다고 해도 여전히 위법은 위법이다. 혹시 모를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다”며 체험학습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의 현장체험학습 관련 교사 대상 설문조사.  현장체험학습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한 학부모 민원과 고소·고발이 걱정되냐는 질문에 97.3%의 교사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뉴스1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의 현장체험학습 관련 교사 대상 설문조사. 현장체험학습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한 학부모 민원과 고소·고발이 걱정되냐는 질문에 97.3%의 교사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뉴스1

특히 학생 안전을 책임지는 일선 교사들이 노란버스법에 큰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교총이 지난 7~8일 전국 유치원과 초등 교원 1만2154명을 대상으로 현장체험학습 관련 긴급 설문조사를 했더니, ‘체험학습 중 일어난 일로 학부모로부터 민원이나 고소·고발을 당했거나 목격했다’는 응답이 30%가 넘었다. 또 ‘노란버스가 아닌 일반 버스를 탔다가 사고가 날 경우 교사들이 책임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은 89%, ‘노란버스법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답도 56%에 달했다. 최근 잇따른 교사 사망으로 교권 침해 논란이 큰 상황에서 노란버스법이 또다른 불씨를 던진 셈이다.

노란버스법에 대한 학부모들 분위기는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에 가깝다. 워킹맘 송모씨는 “교육은 학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의 대처 능력과 협동심·우정 등을 키워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며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모처럼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나 했는데 실망”이라고 했다. “소풍은 사립학교 애들만 가라는 건가” “가족끼리 놀러 갈 형편이 안 돼 학교 체험학습만 고대하던 부모들 가슴에 못을 박는다” “버스가 노란색이면 사고가 비켜 가나”란 말까지 나온다. 반면 “최우선 순위는 아이들 안전이다. 노란버스를 확충하는 데 자원을 집중하고, 그때까진 소풍도 미루는 게 맞는다”는 목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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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행 기자 polyg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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