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
3월 13일 오전 11시경 부산 연제구 부산지검 앞 빌딩에서 굉음과 함께 전신주에서 불꽃이 튀었다. 변호사 사무실과 병원 등이 있는 8층 건물의 전력공급이 중단됐고 근처 다른 빌딩에도 비슷한 피해가 일어났다. 변호사 강모 씨45는 “컴퓨터가 갑자기 꺼져 작업 중이던 재판 관련 자료가 날아갔다”며 난감해했다. 한국전력 직원들이 출동해보니 까마귀가 고압전선을 쪼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전선을 복구하고 전력 공급을 재개하기까지는 약 1시간이 걸렸다.
● ‘까마귀 정전’ 3년간 103건
개발 지역이 확대되며 기존 터전을 잃고 도심에 자리를 잡은 까마귀가 늘면서 이로 인한 정전 피해가 전국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이달 3일 동아일보가 한국전력으로부터 입수한 ‘최근 3년간 전국 까마귀 정전 피해 현황’에 따르면 까마귀에 따른 정전은 2021년 21건, 2022년 47건, 2023년 35건 등 최근 3년 동안 총 103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기준 지역별로는 경기 지역이 6건으로 가장 많았고, 경남과 강원 지역이 각 5건으로 뒤를 이었다. 서울에서도 관련 피해가 2건 발생했다.
까마귀로 인한 정전은 주로 도시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8일 대구 달서구에서는 까마귀가 전기설비를 훼손시켜 아파트 1000여 가구에 전기가 끊기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주민이 겨우 빠져나왔다. 올 2월 울산 중구 태화동과 지난해 9월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도 각각 수천 가구의 아파트가 정전돼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까마귀가 많은 정전을 일으키는 건 까치나 비둘기 등보다 몸집이 크고, 즐겨 섭취하는 벌레가 전신주와 전선에 주로 서식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전 관계자는 “까마귀는 좁은 전선 사이에서 날개를 펴거나 전선에 앉는 것만으로도 합선이나 전선 훼손을 일으킬 수 있다”라며 “실제로 까마귀가 전선에 있는 벌레를 쪼아대면서 벌어지는 정전 사고가 잦다”고 말했다.
● “생태공간 만들고 포획 기준 만들어야”
까마귀가 ‘해로운 새’라는 오명을 쓴 건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활 터전이 넓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까마귀는 주로 숲이나 논밭에서 서식하는데, 개발 지역이 도시 외곽으로 점차 넓어지면서 인간과 생활 공간이 겹치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규모 택지 개발로 논밭과 산이 빠르게 사라지는 경기 지역에서는 까마귀 떼로 인한 피해로 생기고 있다. 경기 수원시에는 매년 겨울 까마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촉구하는 민원이 빗발치고 있다고 한다.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가 한꺼번에 날아와 배설물을 떨어트려 불쾌하고 두렵다는 것. 인근 지역에서도 까마귀가 행인의 머리를 쪼며 공격하거나, 쓰레기봉투를 헤쳐놓는다는 민원이 접수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까마귀 포획이나 퇴치 등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등에 따르면 전력 시설과 농작물 등에 피해를 주는 까마귀와 떼까마귀, 갈까마귀 등은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있다. 이 법에 따라 기초자치단체가 까마귀의 포획을 허가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오발 사고 등에 대한 우려 때문에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부산의 한 기초자치단체 관계자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피해이기 때문에 지자체에는 전담 인력이 없고, 피해가 막심하다는 주민 신고가 접수됐을 때만 엽사에게 포획을 의뢰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까마귀가 삶터를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생태공간을 확보하는 한편, 민간 피해를 예방할 포획 지침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희천 경북대 조류생태연구소장은 “까마귀가 인간과 도심에서 함께 살게 됐지만 어떤 개체가 주로 정전 피해를 일으키는지 등 기초적인 연구와 분석은 여태껏 이뤄지지 않았다”라며 “인명 피해까지 우려되는 만큼 환경부 등이 포획 기준과 퇴치 방법 등을 정해 지자체에 안내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부산=김화영 기자 r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