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오빠가…백골로 집에 돌아왔다[남기자의 체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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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6·25 국군 참전용사 유해 찾는 국방부유해발굴단과의 하루
섭씨 30도 육박하는 더위에, 장병 100명 삽으로 땅 파내며 땀 흘려 유해 손상될 수 있어 조심조심, 하루 5m씩 나아가는 힘든 일 "요즘엔 6·25 전쟁 모르는 신병도 많아…국민 관심이 가장 절실하지요"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세상이 처음 불편해졌지요. 직접 체험해 알리는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체험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며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가장자리가 보이도록 힘쓰려합니다.
"음, 이건 나무… 같아 보이는데요." 땅에 묻힌 지 너무 오래돼 분간이 안 갔다. 김건중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팀장의 물음이었다. 흙 위에 고이 놓인 뼈 같기도 하고 나무토막 같기도 한 무언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김 팀장이 정답을 말했다. "이것도 뼈예요."
초여름 짙어지는 산 내음, 새 지저귀는 소리,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 이토록 평화로운 광경. 그런 산이 오랜 시간 품고 있던 뼈. 뼈와 함께 나왔단 수십 개의 부식된 총알들. 격했을 총성 소리. 이 산을 오르고 지키고 맞서다가, 그 총알에 수없이 죽어갔을 군인들. 그 군인 중 누군가의 뼈. 가지런히 놓인 두 개는 다리뼈, 특히 정강이뼈란다. 갈비뼈, 이런 건 세월에 많이 부서진단다. 가장 강건한 것들만 남는다고. 팔과 다리뼈, 장골류라 부르는 것들이 보통 그렇단다. 유해가 누군지 밝힐 순 있는 걸까. 다행히 단서가 함께 나왔단다. 오대환 유해발굴감식단 감식관이 말했다.
역사를 토대로 상상했다. 경기도 연천의 산. 여긴 북한과 가까운 임진강 근처. 벌어졌다던 코만도 전투. 살펴보니 1951년 가을, 미군이 중공군을 섬멸한 걸로 나왔다. 그렇다면 미군일까, 아니면 중공군일까. 미군이어도 국군이 함께였을 가능성도 있단다. 유해는 침묵하고 있었다. 오 감식관에게 다시 물었다.
"나침반에 중국어가 쓰여 있더라고요. 중공군 이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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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할아버지가 죽기 전 꺼낸 말…"17살 때 여기 묻었는데 맘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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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1만1000여 명은 유해를 찾았다. 이 중 233명은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12만여 명의 유해가 땅 깊이 묻혀있다. 찾은 유해 중 대부분도 아직 익명으로 남아 있다. 꽃 같은 나이에 나라 지키려 싸운 이들. 집으로도, 가족에게도 닿지 못한 국군 장병들. 돌려주는 건 어떤 의미인 걸까. 김건중 발굴팀장이 기억을 꺼내놓은 건 이랬다.
제대로 장례조차 못 치른 게 빚처럼 남았단 할아버지. 김 팀장은 유해를 발굴해 장례를 치러드렸다.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행복해하며 고맙다고 우셨다. 하물며 돌아가실 때에도 이 얘길 했다고. 한 노부부는 지팡이를 짚고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저의 형이 전투에서 죽었는데 이름도 찾을 수가 없어요." 전사자인 걸 확인한 뒤 유해를 찾으면 꼭 알려달라고, 자기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두고 갔다. 뼈에서 추출한 DNA로 확인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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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피 흘린…그랬기에 평화로웠던 여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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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경기도 파주 영평산에 도착했다. 차민규 중위정훈장교가 작업하던 산에서 내려와 있었다. 유해 발굴을 한 지 벌써 4주가 됐단다. 작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유해는 아직 못 찾았고 유품은 하루 평균 약 30개씩 나온다고. 11여단 2대대 장병 100여 명이 땀 흘리고 있었다. 여기, 영평산엔 전쟁의 어떤 기록들이 남았을까. 고준호 조사팀장이 말했다.
몇 문장 안에 담기 힘들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 최승준 소령공보장교이 잠시 뒤 도착했다. 유해 발굴 지역으로 가려면, 영평산을 15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날이 벌써 무더워져 섭씨 30도에 육박했다. 참전용사들이 싸웠기에 이토록 평화로웠던 여름 산.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면 그저 무심히 걸었을 거였다. 보이지 않는 땅 아래를 더 의식하며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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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부서질까…삽질 한 번도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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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가장 쉬운 편입니다. 지난해 하반기엔 금산에 갔었는데요. 1000고지였습니다. 경사가 여기보다 심했습니다. 올라가는 데에만 1시간 넘게 걸렸어요."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사람인데 당연히 힘들었다고.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명감으로 한다며 웃었다. 발굴지에 가니 기초 발굴을 하는 장병들이 모여 있었다. 산 아래에서부터 삽으로 파면서, 정상까지 올라온 거였다. 유해를 찾는 일이다 보니, 자칫하면 상하게 할 수 있어 직접 참여할 순 없었다. 대신 테스트로 파놓은 땅에서 해볼 수 있었다. 김건중 발굴팀장이 말했다. "땅은 썩어서 차츰 쌓이는데요. 70년 동안 얼마나 쌓였을까요. 30cm 정도 됩니다. 밑을 계속 파면 오래된 고생대 흙, 생토층이 나오고요. 여기까지 파보는 겁니다."
"어떤 발굴팀장은 이제 숟가락 들고 다니고, 저는 이쑤시개 형태의 얇은 미술용 붓으로 합니다. 가장 부드러운 붓으로 흙을 긁어내지요. 2주까지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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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초코바 봉지, 수류탄, 박격포 꼬리 날개…모두 실제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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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동안 힘겹게 발굴해 나온 이런 유품이 약 400점이란다. 쭉 놓인 걸 직접 눈으로 봤다. 전쟁이 역사책 안에서 뛰쳐나온 느낌이었다. 모두 실재했던 현실. 그런 게 확 와닿았다. 자유나 평화가 별안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당연하게 얻은 게 아니란 걸 알았기에. 유해 발굴에 핵심이 되는 건 그중에서도 직접 유품이란다. 유품 자체가 누구의 유해인지 잘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오대환 감식관 설명이 이랬다.
나온 걸 토대로 모든 걸 상상해야 하는 작업. 예컨대, 영평산에선 박격포 꼬리 날개가 나왔다. 포탄이 떨어졌단 거고, 굉장한 격전지였단 거다. 종종 집단 유해가 나올 때가 있는데, 이럴 땐 고민이 심해진다고. 발굴병 배성윤 병장이 말했다.
포탄을 직격으로 맞아 날아갈 수도 있고, 웅크리고 있다가 전사할 수도 있다고. 그러니 김건중 발굴팀장은 이리 말했다. "퇴근하고 나서도 계속 고민하며 감식관과 얘기합니다. 어떻게 누워 있었을지, 이 뼈와 저 뼈가 어떻게 연관 있을지, 끊임없이 얘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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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잡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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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를 도울 기술, 즉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가족관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단다. 2021년도부터는 단일 시설에서 보관과 감식, 감정까지 한 번에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국방부 유해감식발굴단에 마련됐다. 뼈는 고체라서 DNA 추출이 더 쉽지 않다. 말랑말랑하게 만든 뒤, 그걸 갈아 넣어서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단다. 이어 유해에서 나온 DNA와, 가족 DNA를 맞춰서 집과 가족을 찾아준다고. 오 감식관은 이리 말했다. 그러려면 유가족들의 유전자 시료를 많이 채취해둬야 한다. 하지만 유해 발굴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여전히 많단다. 전쟁 당시 10살이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살아 있다면 84살. 시간이 많지 않다. 박은석 발굴팀장이 말했다. "생존해 계시는 유가족분들이, 거동도 불편하고 의사소통도 어려운 나이잖아요. 젊은 사람들이라도 알려줘서 유전자 시료 채취라도 대대적으로 했으면 싶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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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 오빠가, 73년 만에 집으로…오열한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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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60년간 거기에 묻혀있었다. 유해를 찾지 못했다. 2011년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장병들이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 발견된 건 강원도 양구군 수리봉 일대였다. M1 카빈 소총탄, 전투화 밑창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치열했던 전투에서 포탄에 의해 숨졌을 걸로 추정이 되었다.
13년이 더 지난 올해 5월에서야, 류홍석 일병은 가족을 만나러 왔다. 참 오랜만이었다. 여동생, 85세 류영순씨는 그새 백발이 다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영순씨는 울면서 이리 말했다. "오빠 유해를 찾았다고, 그 소식을 듣고 잠도 못 이루고 울었습니다. 혹시나 돌아올까 생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어요. 어린 시절, 오빠가 손바닥에 저를 올려놓고 흔들어주던 기억이 생생한데…."
올해 2월, 눈이 한가득 쌓인 겨울. 강원도 평창에서였다. 호 하나에서만 네 명의 유해가 나왔다. 위아래로 겹쳐져 있었다. 척추뼈엔 총알이 박혀 있었다. 김건중 발굴팀장이 고민 끝에 추정한 전쟁 상황은 이랬다. "총알을 맞으시고 그대로 옆으로 누워 숨지신 겁니다. 지금은 도로지만 그땐 산이었을 거예요."
그게 군인 안보 교육 중에 가장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전사한 이들을 찾고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게. 교육이란 말 안에는 무관심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김 팀장이 말했다. "요즘 젊은 장병들은 6.25가 뭔지 모르고 입대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그 정도로 관심이 없지요. 중학생들은 유해 발굴 현장에 와서 뭐 하는 거예요?라며 신났더라고요. 이걸 왜 모르냐고 탓할 수가 없어요. 그건 어른들 몫이니까요."
돌아오는 길, 그 평화로워 보이던 산에, 수류탄 하나가 나무 앞에 아무렇잖게 놓여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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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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