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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 오빠가 백골로 돌아왔다[남기자의 체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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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3회 작성일 24-06-1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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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기사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6·25 국군 참전용사 유해 찾는 국방부유해발굴단과의 하루
섭씨 30도 육박하는 더위에, 장병 100명 삽으로 땅 파내며 땀 흘려
유해 손상될 수 있어 조심조심, 하루 5m씩 나아가는 힘든 일
"요즘엔 6·25 전쟁 모르는 신병도 많아…국민 관심이 가장 절실하지요"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세상이 처음 불편해졌지요. 직접 체험해 알리는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체험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며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가장자리가 보이도록 힘쓰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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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나왔다는 제보로 찾은 경기도 연천의 한 작은 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땅을 파서 발굴한 어느 군인의 뼈. 유해가 이정도로만 나와도 아주 잘 나온 거라고 했다. 70년 넘는 세월에, 뼈가 마치 나무토막처럼 보였다.두개골, 갈비뼈는 거의 바스라졌고, 팔다리 같은 장골만 남았다. 여기서 DNA를 추출한단다./사진=남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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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보세요. 어떤 게 뼈고, 또 나무인지 아시겠어요?"


"음, 이건 나무… 같아 보이는데요."

땅에 묻힌 지 너무 오래돼 분간이 안 갔다. 김건중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팀장의 물음이었다. 흙 위에 고이 놓인 뼈 같기도 하고 나무토막 같기도 한 무언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김 팀장이 정답을 말했다.

"이것도 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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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한 땅에 올려둔 군인의 정강이뼈. 오른 편에 있는 게 나무인데,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유해 발굴이 더 까다롭고 어렵다. 자칫하면 삽으로 다 부술 수 있기에./사진=남형도 기자
73년 만에 빛을 본 사람의 뼈. 그런 걸 직접 본 건 처음이라 어떤 기분을 가져야 할지 몰랐다.

초여름 짙어지는 산 내음, 새 지저귀는 소리,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 이토록 평화로운 광경. 그런 산이 오랜 시간 품고 있던 뼈. 뼈와 함께 나왔단 수십 개의 부식된 총알들. 격했을 총성 소리. 이 산을 오르고 지키고 맞서다가, 그 총알에 수없이 죽어갔을 군인들.

그 군인 중 누군가의 뼈. 가지런히 놓인 두 개는 다리뼈, 특히 정강이뼈란다. 갈비뼈, 이런 건 세월에 많이 부서진단다. 가장 강건한 것들만 남는다고. 팔과 다리뼈, 장골류라 부르는 것들이 보통 그렇단다.

유해가 누군지 밝힐 순 있는 걸까. 다행히 단서가 함께 나왔단다. 오대환 유해발굴감식단 감식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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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와 함께 묻혀 있었던 시계./사진=남형도 기자
"개인 유품, 시계가 나왔어요. 근데 시계는 또 다른 데서 사 온 걸 수도 있어 추정이 어렵고요. 군사용품인 나침반도 나왔어요. 나침반은 갈비뼈 옆에서 발견됐어요. 이걸 소지 유품이라 합니다. 이분 거였구나, 추정하는 거지요. 뒷면이 녹이 많이 슬어서 제가 치약 묻혀서 열심히 닦았습니다. 그랬더니 글씨가 보이더라고요. 그걸 검색해봤지요."

역사를 토대로 상상했다. 경기도 연천의 산. 여긴 북한과 가까운 임진강 근처. 벌어졌다던 코만도 전투. 살펴보니 1951년 가을, 미군이 중공군을 섬멸한 걸로 나왔다. 그렇다면 미군일까, 아니면 중공군일까. 미군이어도 국군이 함께였을 가능성도 있단다. 유해는 침묵하고 있었다. 오 감식관에게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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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나침반이 유해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별하는 기준이 됐다. 갈비뼈 옆에 놓여 있었기에. 여기엔 한자가 쓰여 있었고, 그걸로 중공군 유해라 추정했다. 유해에 대한 정밀감식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될 경우, 중국이 수용 의사가 있을 경우 보낸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럼, 이분은 국군 참전용사셨을까요?"

"나침반에 중국어가 쓰여 있더라고요. 중공군 이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90세 할아버지가 죽기 전 꺼낸 말…"17살 때 여기 묻었는데 맘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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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와 함께 발굴된 무수히 많은 총알들./사진=남형도 기자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4년. 종전 후에도 전사자 13만 명 유해가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9만여 명은 남한에, 3만여 명은 북한에, 1만여 명은 DMZ 비무장 지대에 묻혀 있었다.

그들 중 1만1000여 명은 유해를 찾았다. 이 중 233명은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12만여 명의 유해가 땅 깊이 묻혀있다. 찾은 유해 중 대부분도 아직 익명으로 남아 있다.

꽃 같은 나이에 나라 지키려 싸운 이들. 집으로도, 가족에게도 닿지 못한 국군 장병들. 돌려주는 건 어떤 의미인 걸까. 김건중 발굴팀장이 기억을 꺼내놓은 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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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장을 자세히 알려주는 김건중 국유단 발굴팀장./사진=남형도 기자
"지난해 아흔 살 할아버지께 제보가 왔어요. 17살 때, 지나가던 길에 국군 전사자를 봤대요. 거기에 자기가 묻었다는 거예요. 그냥 묻고 말아버린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대요. 나중에 보니까 시멘트도 깔리고 확장도 됐고요. 할아버지가 폐암에 걸려 돌아가실 때가 되어, 저희에게 유해를 찾아달라고 한 거지요."

제대로 장례조차 못 치른 게 빚처럼 남았단 할아버지. 김 팀장은 유해를 발굴해 장례를 치러드렸다.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행복해하며 고맙다고 우셨다. 하물며 돌아가실 때에도 이 얘길 했다고.

한 노부부는 지팡이를 짚고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저의 형이 전투에서 죽었는데 이름도 찾을 수가 없어요." 전사자인 걸 확인한 뒤 유해를 찾으면 꼭 알려달라고, 자기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두고 갔다. 뼈에서 추출한 DNA로 확인한다고.



6.25 참전용사 피 흘린…그랬기에 평화로웠던 여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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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발굴 장소를 따라 영평산을 올랐다. 고지가 높은 곳에서 전투가 있었던 경우가 많기에, 통상 발굴지까지 가는 것만 해도 산을 많이 올라야 한다. 무더운 여름엔 특히 고생이다./사진=남형도 기자
상상만 해도 얼마나 힘든 일일지. 그러나 한 명이라도 더 찾겠다고 애쓰는 이들. 2000년 봄부터 고생해 온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다. 유해발굴감식단과 국군 30개 부대 장병 1만여 명이 매년 전국 곳곳에 묻힌 유해를 찾고 있다. 잘 들여다보고 알리고 싶었다. 대체 이 넓은 땅 밑에 숨은 용사들을, 밖으로 꺼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12일 오전 경기도 파주 영평산에 도착했다. 차민규 중위정훈장교가 작업하던 산에서 내려와 있었다. 유해 발굴을 한 지 벌써 4주가 됐단다. 작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유해는 아직 못 찾았고 유품은 하루 평균 약 30개씩 나온다고. 11여단 2대대 장병 100여 명이 땀 흘리고 있었다.

여기, 영평산엔 전쟁의 어떤 기록들이 남았을까. 고준호 조사팀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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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 발굴1과장이 통합 회의에서, 4주간 영평산을 발굴한 경과를 전하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6.25 전쟁 발발 당시, 국군 1사단은 적군 기습 공격에 임진강 연안에 방어 진지를 세웠습니다. 이때 영평산 고지에 포대가 배치돼 화력 지원을 했습니다. 또 1951년, 임진강을 건넌 중공군이 1사단을 포위해 섬멸하려 했으나, 외려 큰 피해를 입고 영평산에 방어 진지를 세웠습니다. 국군이 전차 중대로 역습해 영평산에 있던 중공군을 철수하게 했습니다."

몇 문장 안에 담기 힘들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 최승준 소령공보장교이 잠시 뒤 도착했다. 유해 발굴 지역으로 가려면, 영평산을 15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날이 벌써 무더워져 섭씨 30도에 육박했다.

참전용사들이 싸웠기에 이토록 평화로웠던 여름 산.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면 그저 무심히 걸었을 거였다. 보이지 않는 땅 아래를 더 의식하며 걷게 되었다.



유해 부서질까…삽질 한 번도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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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군인의 마지막을 챙겨주기 위해 모인, 후배 장병들. 쉬는 시간에도 안 쉬고 부단히 땅을 파보던 이들이 많았다./사진=남형도 기자
해발 260m 영천산. 발굴지로 향하는 길. 마땅히 디딜 곳 없이, 묶인 줄만 잡고 올라가야 했던 길. 경사가 생각보다 급했다. 그저 올라가기만 하다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산속이었는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홍승혁 병장발굴병이 말했다.

"여긴 가장 쉬운 편입니다. 지난해 하반기엔 금산에 갔었는데요. 1000고지였습니다. 경사가 여기보다 심했습니다. 올라가는 데에만 1시간 넘게 걸렸어요."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사람인데 당연히 힘들었다고.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명감으로 한다며 웃었다.
함께 힘을 모아야만 가능한 숭고한 일. 김건중 발굴팀장이 동기 부여를 위해 장병들에게 하는 말이 이렇단다.발굴지에 가니 기초 발굴을 하는 장병들이 모여 있었다. 산 아래에서부터 삽으로 파면서, 정상까지 올라온 거였다. 유해를 찾는 일이다 보니, 자칫하면 상하게 할 수 있어 직접 참여할 순 없었다. 대신 테스트로 파놓은 땅에서 해볼 수 있었다. 김건중 발굴팀장이 말했다.

"땅은 썩어서 차츰 쌓이는데요. 70년 동안 얼마나 쌓였을까요. 30cm 정도 됩니다. 밑을 계속 파면 오래된 고생대 흙, 생토층이 나오고요. 여기까지 파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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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는 게 힘들다기 보단, 어디에 묻혀 있을지 모르는 유해를 생각하며 삽집을 하는 게 정말 더 어려웠다./사진=최승준 공보장교
하루에 한 명이 깊이 1m씩, 그리 5m를 나아가면서 판다고 했다. 테스트 땅에서 삽으로 콱콱 내리찍으니, 김 팀장이 "그렇게 하면 유해가 다 상한다"며 말렸다. 그러니 살살, 현 지표에서 오래된 지표로, 위에서 아래로 긁어내듯 파야 하는 거였다. 중간에 돌과 나무 등이 계속 걸려서 파기가 정말 어려웠다. 땀이 콸콸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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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나 유품이 나오면, 이리 정교한 도구를 이용해 정밀하게 거두는 작업을 한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리 파다가 유해나 유품이 나올 때. 그때부터 감식단 발굴팀이 정밀하게 작업하는 거였다. 김건중 발굴팀장이 보여준 가방 안엔, 마치 미술도구 같은 정교한 붓 등이 나왔다. 최대한 보존하려 하는 것.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어떤 발굴팀장은 이제 숟가락 들고 다니고, 저는 이쑤시개 형태의 얇은 미술용 붓으로 합니다. 가장 부드러운 붓으로 흙을 긁어내지요. 2주까지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미군 초코바 봉지, 수류탄, 박격포 꼬리 날개…모두 실제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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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 영평산에서 4주간 발굴한 여러 유품들. 전투식량 따개, 커피봉투, 가위, 잉크병. 너무 일상적인 물건들. 역사책에만 기록된 전쟁이 아녔다./사진=남형도 기자
아군과 적군의 총알. 각반전투화 덮개. 커피 봉투. 전투 식량 따개. 미군 군복에 부착된, 11개 별이 있는 단추. 중공군 유품에 많은 연필. 정수제식수 정화하는.

4주 동안 힘겹게 발굴해 나온 이런 유품이 약 400점이란다. 쭉 놓인 걸 직접 눈으로 봤다. 전쟁이 역사책 안에서 뛰쳐나온 느낌이었다. 모두 실재했던 현실. 그런 게 확 와닿았다. 자유나 평화가 별안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당연하게 얻은 게 아니란 걸 알았기에.

유해 발굴에 핵심이 되는 건 그중에서도 직접 유품이란다. 유품 자체가 누구의 유해인지 잘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오대환 감식관 설명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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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13개 각인돼 있는 미군 단추./사진=남형도 기자
"유해 식별에 가장 좋은 건 군번줄인데 잘 안 나옵니다. 그다음엔 이름이 각인된 만년필, 글씨가 적힌 수첩 등입니다. 전투화도 벗기 쉽지 않은 거라서 밑창을 보면 확인할 수 있지요. 전투화 안에서 발뼈가 그대로, 잘 보존된 것도 있습니다."

나온 걸 토대로 모든 걸 상상해야 하는 작업. 예컨대, 영평산에선 박격포 꼬리 날개가 나왔다. 포탄이 떨어졌단 거고, 굉장한 격전지였단 거다. 종종 집단 유해가 나올 때가 있는데, 이럴 땐 고민이 심해진다고. 발굴병 배성윤 병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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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병으로 자원한 홍승혁 병장왼쪽과 배성윤 병장오른쪽./사진=남형도 기자
"강원도 횡성에서 유해가 나왔었습니다. 호 하나에 여러분의 유해가 나왔지요.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떤 자세로 누워 계셨을지, 유품과의 연관성은 어떻게 될지 싶었지요."

포탄을 직격으로 맞아 날아갈 수도 있고, 웅크리고 있다가 전사할 수도 있다고. 그러니 김건중 발굴팀장은 이리 말했다.

"퇴근하고 나서도 계속 고민하며 감식관과 얘기합니다. 어떻게 누워 있었을지, 이 뼈와 저 뼈가 어떻게 연관 있을지, 끊임없이 얘기하지요."



범인 잡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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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를 신중히 살펴보는 오대환 감식관. 그의 외할아버지 역시 현충원에 안장된 참전용사였단다./사진=남형도 기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도 있었다던 오대환 감식관은 "유해 식별이 범인 잡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했다. 뭐가 없는데, 그 없는 가운데 진짜 중요한 걸 찾아야 하는 일이라서. 유품도 다 비슷비슷한 편이라 직접 관련 있는 게 잘 안 나온다고.

그러니 이를 도울 기술, 즉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가족관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단다. 2021년도부터는 단일 시설에서 보관과 감식, 감정까지 한 번에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국방부 유해감식발굴단에 마련됐다. 뼈는 고체라서 DNA 추출이 더 쉽지 않다. 말랑말랑하게 만든 뒤, 그걸 갈아 넣어서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단다.

이어 유해에서 나온 DNA와, 가족 DNA를 맞춰서 집과 가족을 찾아준다고. 오 감식관은 이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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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 전쟁하시다 보니 자식이 없으신 분도 있고, 남아 있는 유족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요. DNA 검사를 하면 염색체가 23쌍이 있습니다. 어머니 세대와 아버지 세대 쪽으로, 8촌의 DNA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려면 유가족들의 유전자 시료를 많이 채취해둬야 한다. 하지만 유해 발굴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여전히 많단다. 전쟁 당시 10살이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살아 있다면 84살. 시간이 많지 않다. 박은석 발굴팀장이 말했다.

"생존해 계시는 유가족분들이, 거동도 불편하고 의사소통도 어려운 나이잖아요. 젊은 사람들이라도 알려줘서 유전자 시료 채취라도 대대적으로 했으면 싶지요."



스물두 살 오빠가, 73년 만에 집으로…오열한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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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후 73년 만에 가족을 만난 고 류홍석 일병의 유해./사진=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오빠가 집에 돌아왔다. 무려 73년 만이었다. 이름은 고故 류홍석 일병. 스물두 살에 6.25 전쟁에서 숨졌다. 제5사단 소속 국군이었다. 여러 전투서 살아남았다. 이어 강원도 양구에 가서 피의 능선 전투를 치렀다. 거기서 북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1951년 8월 27일이었다.

그 후 60년간 거기에 묻혀있었다. 유해를 찾지 못했다. 2011년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장병들이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 발견된 건 강원도 양구군 수리봉 일대였다. M1 카빈 소총탄, 전투화 밑창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치열했던 전투에서 포탄에 의해 숨졌을 걸로 추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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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오빠, 고 류홍석 일병의 유해를 마주한 뒤 오열하는 동생 류영순씨85. /사진=KBS 한국인의 밥상
2022년 3월에, 감식단 탐문관이 고인의 여동생을 찾았다.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대조하고 맞춰보았다. 가족을 비로소 찾는 순간이었다. 한 명의 장병이 돌아오는 과정이 이리 길었고, 많은 이들의 노고가 뒤따랐다.

13년이 더 지난 올해 5월에서야, 류홍석 일병은 가족을 만나러 왔다. 참 오랜만이었다.

여동생, 85세 류영순씨는 그새 백발이 다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영순씨는 울면서 이리 말했다.

"오빠 유해를 찾았다고, 그 소식을 듣고 잠도 못 이루고 울었습니다. 혹시나 돌아올까 생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어요. 어린 시절, 오빠가 손바닥에 저를 올려놓고 흔들어주던 기억이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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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좋아했던 음식들로, 오랜만의 그리움을 대신했다. 오빠 자리엔 훈장이 놓였다./사진=KBS 한국인의 밥상
영순씨가 기억을 더듬었다. 오빠가 좋아했던 음식들을 떠올렸다. 머위가 널렸었던 집에서 만들어 먹었던 바지락머윗대볶음, 고사리 육개장, 숭어찜까지. 따뜻한 밥상이 모처럼 차려졌다. 오빠의 빈 자리엔 훈장이 대신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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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에서 발굴된 유해. 총탄을 맞고 옆으로 쓰러진 모습 그대로였다./사진=남형도 기자
에필로그epilogue.

올해 2월, 눈이 한가득 쌓인 겨울. 강원도 평창에서였다.

호 하나에서만 네 명의 유해가 나왔다. 위아래로 겹쳐져 있었다. 척추뼈엔 총알이 박혀 있었다. 김건중 발굴팀장이 고민 끝에 추정한 전쟁 상황은 이랬다.

"총알을 맞으시고 그대로 옆으로 누워 숨지신 겁니다. 지금은 도로지만 그땐 산이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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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뼈에 총탄이 박혀 있는 모습./사진=남형도 기자
현장에서 우선 약식제례가 치러졌다. 이곳에 너무 오래 계셨는데 이제야 찾아와 죄송하다는, 산을 떠나 좋은 곳으로 가시란 의미라고. 입관하고, 그 관을 태극기로 싸고, 경례와 묵념과 후배 장병들의 도열이 이어졌다. 임시 봉안소를 거쳐 합동 영결식을 했다.

그게 군인 안보 교육 중에 가장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전사한 이들을 찾고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게. 교육이란 말 안에는 무관심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김 팀장이 말했다.

"요즘 젊은 장병들은 6.25가 뭔지 모르고 입대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그 정도로 관심이 없지요. 중학생들은 유해 발굴 현장에 와서 뭐 하는 거예요?라며 신났더라고요. 이걸 왜 모르냐고 탓할 수가 없어요. 그건 어른들 몫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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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약식 제례를 한다. 이제 꺼내드려 죄송하다고, 그럼에도 발견된 것에 감사하다고./사진=뉴스1
그러니 근원적으로 필요한 건 관심이란 말에, 잘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유일한 분단국가, 언제든 전쟁이 날 수 있단 말, 호국 선열의 달이나 순국 용사들에 대한 추모, 그런 말들로 설득이 어렵다면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돌아오는 길, 그 평화로워 보이던 산에, 수류탄 하나가 나무 앞에 아무렇잖게 놓여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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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유해가 발굴된 경기 연천 산, 나무 사이에 껴 있던 수류탄 한 발. 전쟁은 실제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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