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억원 작품 바나나를 꿀꺽…돈 자랑에 먹힌 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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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진 작품을 먹어라! 그러면 유명해진다. 작품값이 더욱 뛸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구호가 앞으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금언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왔다. 지난달 21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바나나 한개를 회색빛 덕트 테이프로 전시장 벽에 붙인 것이 전부인 이탈리아 출신 풍자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설치작품 ‘코미디언’2019을 620만달러약 86억원에 낙찰받은 30대 홍콩 암호화폐 사업가 저스틴 선의 기행이 발단이었다. 그는 8일 뒤 홍콩 페닌슐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놓고 낙찰받은 ‘코미디언’의 작품 핵심인 바나나를 떼어내 ‘꿀꺽’하는 퍼포먼스를 벌여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날 취재한 기자들에겐 플라스틱 패널에 덕트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가 간식으로 주어졌다.
실물 재화에 가치를 붙여 팔고 사는 시장 거래의 원칙과는 180도 거꾸로 가는 기행이지만, 지금 미술시장에선 이를 새로운 치부의 비즈니스로 인식하는 흐름이 있어 문제적이다. 작품의 실체를 먹어치워 없애는 행위 자체가 작가와 소장자, 화상 등 관계자들에게 유명세를 얻게 해주고 잠재적 작품 가치를 더욱 치솟게 하는 치부의 퍼포먼스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이다. 바나나를 떼어 먹은 사업가 선은 가상 암호화폐 거래로 미국과 중국에서 부를 쌓으며 2조원대의 재산을 모은 신흥부자다. 유명 작가가 인증한 진품보증서 한장과 설치설명서 한장을 밑천으로 자신의 정체성인 가상거래 투자를 카텔란 작품의 보이지 않는 개념 미술에 비유하며 예술가처럼 행적을 떠벌린 것이다. 이는 미술이 가상재화 비즈니스, 자산 증식의 유력 수단으로 전락한 21세기 현대미술과 시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실증한 사건이 됐다.
‘코미디언’은 2019년 세계적인 미술품 장터인 미국 마이애미 아트바젤 페어의 페로탱갤러리 부스에서 처음 선보였다. 12만달러약 1억6천만원에 판매된 뒤 전시 중이던 작품을 한 전위예술가가 배고프다며 바나나를 떼어 먹는 퍼포먼스실은 두 작가와 화랑이 짜고 쳤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를 벌여 유명해졌다. 이후 작품은 새 바나나로 교체됐으나 소문이 퍼지면서 다시 내걸린 작품을 보러 관객이 운집하자 전시가 중단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지난해 봄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카텔란 개인전에도 출품됐다가 한 대학생이 역시 배고프다면서 바나나를 떼어 먹고 새 바나나로 교체되는 사태역시 유명세를 얻으려고 한 짓이란 비난이 쏟아졌다가 벌어졌다.
올해엔 급기야 거액을 주고 이 작품의 다른 버전을 사들인 컬렉터가 직접 작품을 떼어 먹은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코미디언’은 새 바나나를 붙여 만든 버전을 진품보증서와 설치설명서를 붙여 판매할 때마다 소장자가 핵심인 바나나를 떼어 먹는 게 관행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거액에 낙찰된 ‘코미디언’ 바나나를 1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판 뉴욕 맨해튼 매점의 방글라데시 출신 점원이 수백만달러에 팔렸다는 낙찰 소식을 듣고 이런 종류의 작품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며 울음을 터뜨렸다는 후문이 현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작품 소유자 선은 그 뒤 이 매점에서 바나나 10만개를 선결제해 매점을 찾는 이들에게 공짜로 나눠 주겠다고 공언해 다시 화제를 모았다.
작품 실체보다 보이지 않는 작가의 아이디어와 발상 자체를 핵심으로 여기는 현대 개념미술은 1917년 프랑스 출신의 거장 작가 마르셀 뒤샹의 저 유명한 화장실 변기에서 선구적으로 실현됐다. 기성품레디메이드에 작가 자신이 ‘넌 내 작품이야’라고 의미를 처음 부여한 뒤샹의 파천황적인 발상은 앤디 워홀, 요제프 보이스, 백남준 등의 현대미술가들에 의해 팝아트와 미디어아트, 사회적 예술 등의 방식으로 새롭게 실행되고 갈래를 쳐나갔다.
배금주의 물신주의에 기울어진 기존 미술의 허상을 까발리고 진정한 예술적 구상과 아이디어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기성품레디메이드을 활용한 개념주의 미술을 확대시켰는데, 애초의 본령은 사라지고 투자자의 명성과 영리 확충에 기여하는 신배금주의의 수단이자 소비재로 오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저스틴 선의 기자회견 해프닝은 앞으로 현대미술이 대중의 허영심과 배금주의에 기반한 가십성 작품과 전문가들이 주로 인증한 진정성 있는 작품으로 이분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뒤샹과 백남준의 사례처럼 보이지 않는 개념을 앞세운 현대미술 작업들은 원래 작품을 필요 이상으로 신성시하며 물신화하는 자본주의 미술시장의 시스템을 조롱하고 비판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 카텔란은 이런 속성을 교묘하게 갤러리와 미술시장의 판매 전략 속에 끼워넣어 영합하면서 이젠 가상거래시장의 홍보용 매체이자 ‘듣보잡’ 투자자들의 명성을 쌓게 하는 용도로 남용하는 길을 터놓은 셈이 됐다.
시장 투자자들의 노리개로까지 동원되는 현대미술의 막장 행각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사람이 개를 무는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면 결국 뉴스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정 전 실장의 비유대로 바나나를 떼어 먹는 소유자의 기행이 계속되고 세간의 관심이 시들해지면 ‘코미디언’의 성가는 떨어질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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