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에게 버려진 15살 아이, 120km 걷게 했더니…[남기자의 체헐리...
페이지 정보
본문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학대 피해 아동 지유와 멘토 주은씨의 8박9일 도보 여행
매일 15~20km씩 걸으며 심어진 자신감, 고비 극복하며 회복되는 생명력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 "학대 피해 아동들, 정서적인 부분 많이 힘들어해…살아갈 밑거름 된단 의미"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세상이 처음 불편해졌지요. 직접 체험해 알리는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체험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며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가장자리가 보이도록 힘쓰려합니다.
15살 지유가명가 제주에 온 첫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분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청 반바지, 하얀 샌들, 쪼그만 배낭을 메고 공항에 도착한 날. 여행 가는 줄 알고 잔뜩 기대했을 아이. 아무렴 당황했겠다, 하고 맞장구쳐주며 그래서 어떡했느냐고 물었다. "한 2~3분 정도 충격받았다가 이겨 냈어요. 이게 고난과 역경을 견디는 걷기라고요? 저를 어떻게 봤길래. 이 정도로 하나도 안 힘들거든요!" 지유는 이를 증명하려는 듯 성큼성큼 길을 서둘렀다. 땀으로 흠뻑 젖은 흰 티에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시원하다며 발목까지 걷은 기능성 바지에 이미 흙이 곳곳에 묻은 운동화. 자기 몸만 한 까만 배낭이 흔들릴 때마다, 텀블러 속 얼음이 경쾌한 달그락달그락 거렸다. 그 소리가 청량한 여름의 리듬 같아 좋았다. 한여름 안개가 자욱한 습한 한라산. 길가에 박힌 돌엔 해발 1400m라 적혀 있었다. 경사가 급해지자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땅겨왔다. 주변은 온통 하얘서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유의 걷기 짝꿍이자 멘토인, 주은씨가 결국 이리 외쳤다. "공주야, 우리 물 한 모금 마시고 갈까? 아이고, 쫓아가느라 죽겠다."
━
유년 시절… 아빠에게 두 번이나 버려진 아이
━
엄마는 도망쳤다. 지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 컸다. 아이는 방황했다. 거짓말을 하거나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조부모가 감당이 안 된다며 양육을 포기했다. 아이를 아빠에게 보냈다. 아빠도 못 키운다며 지유를 길바닥에 버렸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방임 학대로 신고가 됐다. 엄마는 도망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포기하고, 아빠는 유기했다. 지유의 죄 없는 유년 시절이 그리 고달팠다. 그리 그룹홈이 집이 되었다. 학대당했거나 부모와 살 수 없는 아이들이 함께 사는 곳. 겨우 초등학생인데 많은 부침을 겪었다. 그럼에도 지유는 아무렇잖은 듯, 다 괜찮다며 지냈다. 그러나 잦은 거짓말과 문제 행동을 보였다. 버려졌단 생각. 힘들었을 마음. 그러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였다. 그룹홈 시설장은 지유를 안타까워했다. 아이가 현실을, 자기 마음을 그대로 직면했으면 좋겠다고. 심리상담도 치료도 무용하다 느낄 때 붙잡은 게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도보여행이었다.
━
48살 주은씨와, 15살 지유의…120km 걷기 여행
━
"학대 피해당한 아이들은 여러 정서적인 부분에서 힘들어해요. 상처투성이 삶으로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열등감이 생길 수 있고요. 걸으면서 스스로 고난을 이겨보고, 성취할 수 있단 자신감을 얻자는 거지요.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요." 보이지 않는 상처마저 염려하는 좋은 어른 아닌가. 함께 걸어보고 싶었다. 참여한 건 다섯 번째 날이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해 서귀포로 향했다. 그날은 한라산에 가는 날이었다. 영실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어리목까지 걷는 길. 멘토 주은씨사회복지 공무원, 지유와 주차장에서 만나 인사하고 바로 걸었다.
"쌤, 오늘은 이 정도면 괜찮겠는데요? 엄청 힘들다고 했는데." 지유 "공주, 안 돼, 그런 말 하면. 그런 거 몰라? 응급실에서 오늘 괜찮다고 하면 위급 환자 온다." 주은씨
━
물을 2리터씩 마셔도 화장실에 안 갈 만큼
━
"진짜 건물이 하나도 없었어요. 도로만 따라 걸었으니까요. 여기서 쓰러져도 날 아무도 못 볼 것 같은 거죠. 남아 있는 건 악이랑 깡밖에 없었어요.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물을 2리터씩 마시는데 화장실에 한 번도 안 가고 싶은 거예요. 땀으로 다 배출하니까. 내내 생각했어요. 쓰러지면 헬기라도 띄워주겠지." 2km 정도 걷다가 중간에서 쉬며 들은 얘기. 힘듦을 겪고 견디면 무용담이 된단 것. 지유가 말할 때 표정에 활기가 있어 좋았다. 마치 정글의 법칙을 찍는 것 같았다고. 여기 와 도마뱀도 처음 봤고, 지렁이며 신기한 벌레를 다 봤다고. 말벌도 이제 안 무섭다며.
"난 세상에서 물이 이렇게 맛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기 와서."
"우아아아와아아아, 너무 시원해!" 고생하며 땀을 흘린 이들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행복이었다.
━
가장 소중한 일기장이 젖지 않도록
━ "천연 미스트 같아. 근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부니까, 기분이 좀 별론데요. 하하." 내 모자가 거센 바람에 날아가 풀더미에 박힐 정도.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라산 고지대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지유가 가방을 방수 커버로 쌌다. 알고 보니, 어제 가방이 물에 젖었단다. 제일 아끼는 일기장이 물에 젖어 속상했다고. 글씨도 조금 번졌다고 했다. 허투루 한 고생이 아녔다고. 이날은 촘촘히 준비해 온 지유를 보며 느꼈다. 모기 기피제를 미리 뿌리자고 얘기한 것도 지유였다. 그게 아녔으면 신선한 모기 헌혈차가 될 뻔했다. 주은씨가 말했다. "어제 공주랑 상의했거든요. 산에 올 때 정말 끼니가 되는 햄버거 같은 걸 살까, 아니면 다른 걸 살까. 지유가 그러는 거예요. 쌤, 햄버거는 습하면 채소도 있고 상할 수 있다고. 단백질바를 사서 칼로리만 보충하고, 하산해서 밥 먹자고요. 좋은 방법이라고 했지요."
"오로지 한 아이를 존중하기 위한 여행입니다. 하루에 정해진 15킬로미터 내지 20킬로미터 거리를 걷는 걸 빼면, 나머지 시간은 모두 아이에게 주도권을 줍니다. 끼니마다 무얼 먹을지 아이가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아이와 비교해 잘 걷는지 못 걷는지 평가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
"약한 거 보면 화나요"…발 아파도 괜찮다던 아이
━
처음 안 사실이 있었다. 지유가 평발이란 거였다. "제가 평발이란 말이에요. 많이 걸으면 아파, 그러잖아요. 근데 괜찮아요. 적응된 거죠. 평발이 아닌 건 아닐까요, 하하." 그러고 보니 괜찮단 말을 참 많이 했다. 그룹홈에서 함께 지내는 언니가 나간 뒤, 대뜸 전화해 욕할 때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들어본 욕을 쏟았다고 했는데도. 오늘 등산 코스 역시 무난하다고 했다. 산책 코스라고. 산길을 8km 넘게 걸어, 평소 운동을 많이 하는 나 역시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그러다 결국 접질렸다고 말할 때마저 안 아프다고 했다. 중간중간 쉬는 도중, 아빠와 10대로 보이는 아들이 내려가는 걸 봤다. 아들은 지팡이를 탕탕 찍으며, 괴로워하며 인상을 많이 구긴 모습이었다. 힘듦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걸 지유가 보더니 이리 말했다. "저런 거 보면 화나요. 약해서 화나는 것 같아요. 뭘 해도 잘 못 할 것 같아."
━
약해도 괜찮아, 쌤도 힘들었는 걸
━
그러나 말수가 줄어드는 걸로 보아 알고 있었다. 씩씩하게 잘 버틴 지유도, 연일 15~20km씩 걷는 강행군에 지칠 수밖에 없단 걸. 멘토인 주은씨도 그게 보이는듯했다. 보채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얘길 털어놓는 걸로 대신했다. 사회복지 공무원을 하며 죽을 듯 힘들었던 일로.
"하하, 그럼 아픈뎅? 그래야죠."지유 "그래서 그랬어. 선생님, 말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아냐면서, 오셔서 그대로 안 하시기만 해보세요, 그랬어. 그날 사표 쓰려고 했지. 진짜 왔더라고. 근데 오면서 이미 화가 한풀 꺾였더라. 진상 만나 개망신 당한 날마다 스타벅스 가서 텀블러를 하나씩 샀어. 부끄럽긴 한데 내 보상심리였달까." 주은
━
아프다고 털어 놓은 아이…무릎 보호대를 해주었다
━
"아아아, 뭐가 들어갔어요." 신발에 가시가 들어간 거였다. 아플 때 아프다고 바로 표현한 게 좋았다. 내내 입고 있던 감귤 색깔 우비를 벗겠다고 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거의 젖은 빨래 수준이었다. 지유는 레전드라며 뿌듯해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오, 무릎이 지지 되니까 훨씬 좋아요." 그리 10km가 넘는 코스를 완주했다. 어리목 출입구를 나오며 지유는 와,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해냈다는 뿌듯함. 힘듦의 한계를 끌어올려 본 경험으로, 앞으로의 삶도 흔들릴지언정 완주할 수 있을 거라고.
"쌤, 오늘 아침엔 다행히 눈이 너무 잘 떠졌는데요. 내일 성산일출봉 일출 볼 땐 새벽 4시라서, 그땐 깨워 주셔야 할 거예요. 벌떡 일어날 수도 있지만요." 그리 도움을 청하는 것도, 시원한 버스에 앉자마자 곤히 단잠에 빠져버린 모습도 다 좋았다.
━
고비를 극복한 아이들에게, 생기는 놀라운 일
━
실제 경험담이 궁금했다. 쇠이유를 설립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저서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엔 이런 얘기가 나왔다. 2002년에 함부르크에서 베니스까지 걸었다는 발레리 얘기였다. 소년 범죄를 저질렀고 마약까지 했던 청소년이었다. 그가 걷기 여행에 대해 이리 말했다.
"걷고 난 후 아이들이 참조할 수 있는 긍정적인 행위의 기억이 남는다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다. 그들은 마흔, 쉰, 예순 살이 되어도 젊은 시절에 경험한 여정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증 약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이가 약을 끊어 주치의를 놀라게 한 일, 아동학대를 당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던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일, 엄마와 갈등으로 가출해 성매매를 하며 절망의 끝을 달리던 아이가 회복돼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8박 9일의 짧지만 긴 이 여행이 아이들에게는 큰 축복임이 분명했습니다."
산을 걷다 쉴 무렵에, 지유에게 하고픈 일이 있는지 물었다. 눈을 피하다 마주치다를 반복하며 아이가 말했다. "지금 말씀드리기 좀 그렇긴 한데, 화장도 안 하고 날 것 그대로라서. 승무원을 하고 싶단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저 원래 예쁘거든요, 진짜로. 화장한 얼굴이, 내 얼굴인 건데…." 그런 지유에게 주은씨가 말했다. "공주야, 너 화장하면 화장한 대로 예쁜데, 지금이 훨씬 예뻐." 그러고 보니, 지유에게 이름과 공주란 말을 함께 썼던 주은씨에게 나중에 이유를 물었다.
"큰 애랑 둘째가 딸이에요. 집에서 딸래미들 부를 때 큰 공주, 작은 공주, 이렇게 부르는데요. 어디서든 무례함을 당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존귀하게 여겨지는 사람이기를 원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리 덧붙였다. "이런 마음은 딸들뿐 아니라 지유에게도 똑같아서, 은연중에 그리 불렀나 봅니다."
[관련기사]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 한국 나오자 "북한" 부글부글…개막식 역대급 사고 터졌다 ☞ "엄마 콩팥 하나 더…" 양지은 아들, 신장이식 듣고 놀라며 한 일 ☞ 유승민, 사우나 버스서 신유빈 구했다…탁구대표팀 환호 ☞ 아프리카서 납치된 PD, 끌려다니면서도 피부 관리 ☞ "암호화폐 투자 실패 후 숨진 아들…내 탓, 미안해" 오열한 배우 ⓒ 머니투데이 amp;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관련링크
- 이전글"도저히 제어가 안된다" "저희 좀 살펴주십쇼"…읍소에도 무응답 류광진 ... 24.07.27
- 다음글전국 곳곳 강한 소나기…최고 체감온도 35도 찜통더위 24.07.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