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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판 걸 어쩌라고"…과일 도매 10년, 오늘도 사장님한테 돈을 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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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회 작성일 24-12-0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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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우리가 일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섭니다. 우리가 일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퇴근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퇴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지만 정해진 월급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자영업자들입니다. 한승태 르포작가가 짧은 글이지만 자영업자들의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가늠해보려고 합니다.






현성가명이 잠에서 깼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조금 더 자고 싶다’가 아닌 날이 한달에 딱 두번 있다. 15일과 30일. 가게 결제 마감일이다. 이때는 ‘전화 걸기 싫다’라고 적힌 도장이 이마 한가운데 쾅 찍히는 기분이다. 또 전화기를 붙들고 돈 달라며 애걸복걸할 걸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냥 이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수금은 도매 시장의 풍토병이다. 가락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미수금을 기본 3천만~4천만원 정도는 깔고 앉아 있다. 상대가 잠적했거나 너무 오래 지나서 받기를 포기한 미수금까지 다 합하면 억 단위로 올라간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 10시30분이다. 아내는 부엌에서 사과를 깎고 있다. 현성이 출근하고 나면 아내도 다음날 출근 복장을 골라두고 잠자리에 들 것이다.



과일 경매는 새벽 2시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지방의 거래처는 이르면 밤 11시부터도 시장을 찾는다. 이 시간대 손님들은 대부분 강원도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이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강원도 번호판의 6.5t 윙바디 트럭들이 주차장에 빼곡히 들어찬다. 이들은 과일뿐 아니라 채소, 수산물까지 알뜰하게 쟁여 넣고 새벽 1시가 되기 전에 시장을 빠져나간다. 강원도 트럭들이 떠나고 나면 시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그러다 새벽 1시50분쯤, 안내 방송이 울린다.



“잠시 후 2시부터 과실류 경매를 시작합니다. 중도매인 사장님들께서는 거래 참가증, 모자, 응찰기를 지참하시어 경매에 참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발주는 없지만, 경매를 빠질 순 없다. 한달에 최소 8천만원어치 이상 물건을 사지 않으면 도매법인에서 경매 참가를 제한한다. 매일 과일을 350만원어치씩 사야만 도매인 자격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사가 안될 때도 꾸역꾸역 과일을 사들여야 한다. 시장엔 하루에만 4천만원어치 물건을 사들이는 가게도 있지만 현성의 가게, 정확히 말하자면 현성의 아버지 가게는 전혀 아니다.





새벽 2시 무렵, 경매 시작 전 경매를 기다리는 과일들이 경매장에 쌓여 있는 모습이다. 한승태 제공


경매장에는 별다른 시설물이 없다. 아스팔트 바닥에 과일 상자가 생산자별로 쌓여 있다. 이미 경매장에는 상인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맨 위 올려진 상자를 뜯어 과일을 맛보고 어떤 생산자의 물건을 살지, 얼마 정도에 살지 수첩에 메모한다. 10월 말이면 사과, 배가 들어가고 귤, 단감이 올라오는 시기다. 현성도 대세를 따라 귤과 단감을 좀 사둘 생각이다. 늦게라도 주문이 들어올 수 있고 또 손님이 찾을 때를 대비해 어느 정도 물건을 갖춰두어야 한다.



귤은 작을수록 맛이 좋다. 중간M 크기보다는 작은S 귤을 비싸게 친다. 또 귤 표면이 둥글고 반질반질한 것보다는 우둘투둘하고 울룩불룩 올라온 게 좋다. 이런 귤들이 껍질도 잘 까지고 맛도 좋다. 시장에 나와서 처음 배운 게 좋은 과일 고르는 법이었다. 그때는 일하는 게 즐거웠다. 뭐랄까, 하루하루가 진짜라고 느껴졌다. 당시 현성은 제약회사 영업직을 그만두고 집에 박혀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가게 사정이 나빠져서 직원을 다 내보냈다며 당분간만이라도 가게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 당분간이 10년이 됐다. 이유야 붙이기 나름이겠지만 현성은 자기가 빠지는 순간 부모님이 평생을 일궈온 가게가 무너져내리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경매는 빈익빈 부익부의 연장선이다. 귤은 목표한 만큼 샀지만, 단감은 얼마 사지 못했다. 여기선 소매점처럼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없다. 50상자나 70상자가 경매에 올라오면 한 묶음을 다 사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필요한 건 20상자뿐이다. 그러면 고민이 된다. 30상자 남는데 이건 그럼 누구한테 파나? 여기는 다이소가 아니다. 과일은 생물이다. 재고는 상품이 아니라 원수다. 쳐다보고 있으면 그저 밉고 원망스럽기만 하다. 재고 걱정을 하면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되고 망설이다 보면 괜찮은 건 금세 다른 데서 가져가기 마련이다. 발주량이 많은 가게라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다른 상인들이 쫓아올 거 고려해서 시세보다 천원, 2천원 더 써서 내면 바로 낙찰받는다. 장사가 잘되는 가게는 좋은 물건을 충분하게 확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가게는 번번이 물건을 놓치고 그래서 손님들이 떠난다. 악순환이다.



매장으로 돌아오면 거래처에 전화부터 돌린다. 새 상품이 계속 쌓이기 전에 남아 있는 귤은 반드시 밀어내야 한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직 발주가 없으셔서 오늘 뭐 필요하신 거 없으신가 해서 전화드렸어요. 예. 요즘 감귤이 괜찮아요. 이제 귤이 쭉쭉 올라올 거 같아요. 안 필요하세요? 지금 시세가 괜찮아요.”



과일 도매는 천원 떼기 장사다. 과일 도매한다고 하면 친구들이 돈 많이 벌겠다며 수군거린다. 분통 터지는 소리다. 상자당, 딱 천원 붙여서 판다. 대부분의 도매상이 천원 정도 마진으로 물건을 판다. 한 상자 1만1천원에 산 귤을 천원 떼기를 해서 100상자 팔아봐야 10만원 이익이다. 그나마 요즘엔 하루에 100상자 정도 팔리는 날도 많지 않다.



물건이 나가기 전에는 손질이 필수다. 과일은 받은 그날부터 썩는다. 그래서 재고가 그토록 두려운 거다. 상자를 뜯어서 썩거나 상할 기미가 보이는 과일은 골라내서 보내야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귤은 상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어느 가게나 지름이 1m 정도 되는 돗자리 재질의 원형 바구니가 있다. 여기에 한 상자씩 과일을 쏟아붓고 상하거나 무른 걸 골라내고 빼낸 만큼 멀쩡한 거로 채워 넣는다. 며칠 전부터 제주도에 비가 많이 왔다. 비를 맞은 과일은 더 빨리 상한다. 상한 귤이 상자마다 4개 이상 나온다. 재고가 40상자가 넘는데 이런 상태면 전부 손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적게 잡아도 버리는 귤이 두 상자는 나올 것 같다.



8시가 넘어서야 귤 손질이 끝난다. 주문이 들어온 물건을 트럭에 실어주고 나서 아침밥을 주문한다. 밥을 먹고 나면 수금 전화를 돌려야 한다. 마감 치는 날에는 식당 주인이 제일 부럽다. 가락시장에서 미수금 없이 돈 버는 데는 식당이랑 주차장 옆에 서 있는 음료수 자판기뿐이다. 얼마 전, 시장 엘리베이터에 분홍색 안내문이 붙었다.





“농산물 거래 후 고의적 또는 악의적으로 구매 대금의 결제를 회피하는 구매자들에 대한 정보를 사 전과연사단법인 전국과실중도매인조합연합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유함을 알려드리오니 이 점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원 떼기 장사라도 돈만 꼬박꼬박 들어오면 아무 불만 없다. 도대체 이게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돈을 꿔달라는 것도 아니다. 시세보다 값을 비싸게 쳐달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판 물건 값, 딱 그것만 달라는 거다. 미수금은 인질이나 다름없다. 미수금이 어느 정도 쌓이면 쌓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거래처 요구대로 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고!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건강하시죠? 요즘엔 아침에 매우 쌀쌀하네요. 예. 하하. 다름이 아니라, 그게 하하 이번 달 대금이 좀 모자라게 들어왔네요. 하하.”



“아니야. 그거 맞아.”



“예? 아… 그게 지금 이번 달에 1070만원 보내주셔야 하는데 900만원만 들어왔어요.”



“그거 맞아.”



“맞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거기서 보내준 물건 팔아서 내가 번 돈이 900이야. 내가 복숭아 썩은 사진 보내준 거 봤지? 내가 팔지도 못한 물건 값을 줄 순 없잖아?”



“아니, 대표님 그거는 저희가 보내드리고 나서 며칠이 지난 거잖아요? 그때도 제가 산지에 비가 많이 와서 금방 상한다고 발주량 좀 줄여 달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야, 요 길 건너 홈플러스에는 입고된 지 일주일 지난 것도 빤질빤질해. 너가 멀쩡한 물건을 보내주면 내가 돈을 왜 안 줘? 안 그래?”



“대표님, 저희가 그게… 요즘 시장이 정말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저 그러면 복숭아 로스난 거 제하고 딱 천만원만 좀 채워주세요.”



“… 야, 너 나랑 앞으로 장사 안 할 거야?”



“저희야 항상 감사하죠.”



“천만원 다 받고 싶으면 좋은 물건 싸게 사서 보내. 그렇게 해서 내가 천만원어치 물건으로 1200 벌면 1200 다 보내줄 테니까. 됐지? 끊는다.”



마감일이면 예전에 티브이TV에서 본 영상이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다. 50이 넘은 미국인 남성이었는데 한국인 아내를 따라 한국에 와서 와인을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망했다. 사회자가 이유를 묻자 화기애애한 가족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건 판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신용이라는 건 거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물건만 가져가고 돈을 안 주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달라고 조르고 졸라야 간신히 일부만 받을 수 있었다, 도저히 그런 상태로는 사업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현성이 아직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기 전이었다. 마감일마다 이 영상이 생각나는 이유는 그 미국인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반응이 떠올라서다. 현성은 생각했다. 지가 사업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망한 거지 어디서 남 탓은…. 현성은 이제 그 와인 수입상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안다. 지금도 목 언저리가 화끈화끈한다. 현성은 그 성난 미국인 아저씨를 떠올리며 다시 전화를 건다.



한승태 르포작가



* 한승태 르포작가: 대학을 졸업하고 꽃게잡이 배, 주유소, 양돈장 등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퀴닝’ ‘고기로 태어나서’ ‘어떤 동사의 멸종’을 썼다. 제59회 한국출판문화상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한승태 작가.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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