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달력 걸어야 부자 된대" 귀한 몸 된 종이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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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고 복이 온다?
진화하는 달력 풍수
11월 말 수도권 은행 영업점에 내걸린 안내문. 은행 달력을 구하려는 시민의 문의가 많자, 신년 달력이 벌써 소진됐다고 써붙였다. 은행 달력 발행수가 적어지면서 우수 고객에게만 주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인터넷 커뮤니티
올해는 11월부터 나섰는데도 은행마다 “저희 고객 아니면 못 드린다” “이미 소진됐다”며 퇴짜를 놨다. 딱 한 곳에서 사소한 일거리를 만들어 창구 업무를 본 뒤 달력을 부탁하자, 직원이 “원래 이렇게는 안 드리는데…”라며 숨겨둔 탁상 달력 하나를 꺼내왔다고 한다.
연말을 앞두고 종이 달력 쟁탈전 시즌이 돌아왔다. 휴대폰에 달력 있는데 누가 종이 달력 보느냐고? 눈 침침한 분들에겐 날짜가 큼직하게 적혀 있고 메모도 할 수 있는 실물 달력이 필요하다.
젊은 층엔 종이 달력이 꼭 날짜 보려고 걸어두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 되고 복이 들어오는 일종의 ‘풍수 소품’이다.
11월 초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의 한 인쇄소에서 관계자가 2025년 을사년 달력을 제작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도 큰 글짜 달력이나 특정 기업이나 업체의 종이 달력은 여전히 수요가 많다. /연합뉴스
황당하지만 틀린 말이라 할 수도 없다. 애초 현금 흐름이 활발해 은행 갈 일이 많은 부자가 은행 달력을 받아오는 법. 선후先後가 뒤바뀐 셈이다. 또 통상 은행 달력에 납세 기한이나 손 없는 날, 음력과 기념일 등이 표기돼 있어 재테크 스케줄을 짜기 좋은 것도 사실이다.
과거 달력은 은행의 고전적 판촉 방식이었다. 연말이면 말단 행원들이 달력 뭉치를 들고 주택과 상가를 누볐다. 한 번 걸린 달력은 1년 내내 홍보 효과를 냈다.
중고거래 플랫폼이나 지역 커뮤니티에선 신년 은행 달력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은행에서 공짜로 주는 사은품을 발품 손품 팔아 확보한 이들이 1만원 안팎에 판다. /중고나라
이처럼 은행 달력은 귀해지는데 재물운에 목숨 거는 사람은 많아졌다. 요즘 지역별 커뮤니티마다 20~40대 직장인과 주부 사이에선 어느 은행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해야 달력을 주는지 실시간 정보가 오간다.
달력 배부하는 날 아침부터 은행과 새마을금고 앞에 오픈런도 한다. “달력 거지”라고 자조하면서도 중요한 의식을 치른 듯 뿌듯해한다.
한 시중은행이 최근 일정액 이상 예금한 고객에게만 2025년 달력 신청 자격을 주고, 그 중에서도 추첨을 한다며 낸 이벤트 공지. 많은 은행들이 이렇게 달력 추첨 이벤트를 한다. 은행 달력이 그만큼 귀해졌다는 방증이다. /SC제일은행
이런 은행 달력들은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1만원 안팎에 거래된다. 가수 아이유를 모델로 세운 우리은행 탁상 달력 등은 인기가 많아 웃돈이 더 붙는다.
치킨·피자·커피 등 요식 업체와 유명 식당이 만든 달력도 인기다. 걸어두면 ‘먹을 복’이 생긴다고.
이 업계의 강자는 대전의 명물 빵집 성심당 달력이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 시즌에만 한정 수량 나눠주는 희귀템으로, 뒷장에 매달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빵 쿠폰이 붙어 있다. 중고 시장에서 2만원 안팎에 거래된다.
대전의 명물 빵집인 성심당의 쿠폰 달력. 크리스마스 시즌에 3만원 이상 구매해야 주는 희귀템인데다, 빵 쿠폰이 수마원 어치 붙어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병·의원이나 약국에서 나눠주는 달력엔 호불호가 갈린다. 일부 무속인이 “병원·약국 달력은 아플 일 생기니 줘도 받지 마라” 하는가 하면, “제약사 달력은 건강에 좋다”고도 한다.
“주류 회사 달력은 걸어두면 술 마실 일만 생겨 건강도 돈도 잃는다” “망한 회사 달력은 걸지 말라”는 말도 있다. 달력으로 날짜 보고 교과서 싸고 딱지 접던 시절엔 상상 못한, 21세기 달력의 쓰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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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행 기자 polyg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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