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봉꾼으로 성병 달고 산 이 남자···악몽같은 결혼 후 대왕으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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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67]
세기의 결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공주와, 이웃 나라 잘생긴 미남 왕자의 혼례가 치러지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름 더위가 풀이 꺾인 8월의 말, 프랑스는 풍요롭기 그지없었지요.
만록의 푸르름처럼, 시민들의 표정도 밝기만 했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향한 축하의 박수가 프랑스의 영화를 상징하는 듯 보였지요. 마침 이날은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 모두가 외칩니다. “신의 가호가 이 아름다운 부부와 함께하기를.” 그런데, 어째서인지 신부 가족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증오가 가득한 표정으로 신랑을 바라보고 있어서였습니다. 새 가족이 아니라 원수 중의 원수를 보듯 했지요. 식장에 불길한 기운이 스밀 때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립니다. “신랑의 하객을 모두 죽여라.”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이던 결혼식장이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갑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신랑. 신부와 관계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부인을 냅두고 여자란 여자는 모두 건드리고 다닌 탓에 성병으로 죽을 위기까지 몰렸었지요. 역사는 새옹지마라고 했던가요. 결국 이 사건이 한 위대한 왕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됩니다. 프랑스의 역사를 뒤흔든 이날의 현장을 함께 걸어 보시지요.
커지는 종교갈등...결혼으로 봉합을 시도한 프랑스
“이 결혼이 프랑스를 하나로 뭉칠 것이네.”
때는 1572년 8월 24일. 결혼식의 주인공은 프랑스 왕 샤를9세의 여동생 마르가리트 드 발루아와 이웃나라 나바르의 왕 앙리4세였습니다. 왕족끼리의 결혼식은 중세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이 혼례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합이 종교 분쟁의 봉합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정확히 10년 전, 프랑스는 종교적 내란에 빠졌습니다. 프랑스의 성직자였던 장 칼뱅이 개신교 혁명을 이끌고 있어서였습니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내세운 루터교보다 더욱 급진적인 교리였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분은 오직 예수뿐이시다.” 교황청의 역할을 완벽히 부정합니다. 프랑스는 가톨릭의 맏딸이었습니다. 장 칼뱅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지요. “하나님 아래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산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 전위적인 메시지도 불손하기 짝이 없었지요. 가톨릭의 교리와는 완전 배치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그를 스위스 제네바로 추방하지만, 칼뱅을 추종하는 세력은 비 온 뒤에 솟아나는 죽순과 같이 늘어갑니다. 가장 독실한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위그노’칼뱅주의 개신교라는 불안 요소가 싸게 트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중 이웃 나라 나바르가 가장 골칫거리였습니다. 대표적인 개신교 국가로서 프랑스 위그노들을 물밑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로서는 어떻게든 나바르 왕국과 연을 맺고 위그노 확장을 막을 필요성이 있던 셈입니다. 프랑스의 실세인 샤를 9세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딸 마르가리트를 나바르의 왕 앙리4세에게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한 이유입니다.
프랑스 드디어 봉합되나 했더니...
“가톨릭이든, 개신교도든 우리 모두 프랑스가 되자.”
나바르 왕국으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대국’ 프랑스의 사위로 들어간다는 건, 왕위계승도 엿볼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식이 일어난 8월 24일. 그들의 믿음은 금세 산산이 조각납니다. 프랑스군이 학살군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신랑 하객과 위그노들을 모두 죽여라.” 특히 개신교의 대표 주자였던 콜리니 제독도 표적이 됐습니다. 파리 궁정에서의 학살 소식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폭력은 본질적으로 전염성이 짙습니다. 보르도, 툴르주, 오를레앙.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든 도시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이날 결혼식 날 사망한 사람만 전국적으로 적어도 3000명, 최대 3만명으로 추정됩니다. 위그노들은 모두 개신교 국가로 도망갔지요. 망인의 숫자도 충격적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이제 분열하는 국론이었습니다. 위그노들은 피의 보복을 부르짖었고, 프랑스 진압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다시 내란의 위기에 선 프랑스였습니다.
대학살의 범인은 친정엄마 카트린?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그림은 아니었네.”
이 학살을 주도한 건 프랑스 가톨릭 대표 신자이자 왕 샤를9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 추정됩니다. 이름에서 보듯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여성.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배출한 만큼 가톨릭에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당연히 신교도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던 위치였습니다. 카트린이 아무리 광신적 가톨릭 신자여도, 결혼식을 학살의 현장으로 만들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습니다. 결혼을 추진할 때만 해도 그녀는 진심으로 두 종교의 화해를 염원한 것으로 전해졌지요. 카트린은 그러나 몰랐습니다. 프랑스 가톨릭교도가 얼마나 위그노를 증오하는지를. 가톨릭 세력은 지난 10년간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일으킨 반란의 폐해를 곱씹었습니다.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미워하고, 전쟁을 하고, 칼부림까지 벌이던 그 일을요. 세 차례나 일어난 내전 속에서 초토가 된 프랑스였습니다. 그 원흉은 바로 위그노여야만 했습니다.
프랑스 왕실에 반감을 가진 가톨릭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인 법원·종교 등 주요 집단이 이 결혼을 보이콧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파리의 민심도 점점 흉흉해집니다.
“프랑스 왕실이 개신교로 넘어갔다”는 유언비가 퍼져가지요. 두 사람의 결혼이 정치적 위기를 부르던 셈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모후 카트린과 샤를 9세에게 가톨릭 세력의 수장 기즈공작 앙리너무 많은 앙리가 찾아왔지요. “축하연에 빠져들었을 때, 위그노를 모두 쓸어버려야 합니다. 안 그럼 또 반란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긍정의 의미였습니다. 프랑스에서 대학살이 일어난 배경이었습니다. 리옹 지역에서는 강이 위그노 시체로 가득차 석 달동안 물을 마시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개신교의 수장 격인 콜리니 제독은 그 목이 잘렸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를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을 정도입니다. 로마에서는 사흘 동안 파티가 열렸지요. 대학살을 기념하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프랑스가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다”면서요. 개신교도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지요. 죽거나 떠나거나.
신랑의 목숨을 구한 마르가리트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하세요, 우선 살고 봐야합니다.”
새 신부 마르가리트는 편집증적 가톨릭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새신랑을 죽게 놔두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요. 앙리 4세가 임시 방편으로 개종을 약속하고 일단 후일을 도모하도록 설득합니다. 샤를9세와 카트린으로서도 그를 죽이는 건 정치적으로 위험했기에, 일단 가두는 것으로 정리하지요. 갇힌 앙리4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준 것 역시 새신부 마르가리트였습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실하진 않았습니다. 우선 종교적으로 양극단에 있었던 데다가, 두 사람 모두 ‘자유연애’를 매우 즐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가리트는 후대에 의해 ‘색정광’으로 묘사될 정도로 뭇 남성과 성관계를 즐깁니다. 추문이 워낙 잦아 궁정에서 추방당할 정도였지요. 앙리4세 역시 결혼 직후부터 궁정 귀족부인들을 꼬셔 자기 침대로 데리고 가곤 했습니다. 성병을 달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샤를9세의 죽음...정치적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
“샤를9세 폐하가 승하하셨도다.”
프랑스 정치적 환경이 다시 격변합니다. 왕 샤를 9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왕좌는 동생 앙리3세프랑스엔 앙리가 너무 많습니다에게 돌아갑니다. 정치적 혼란이 느슨한 틈을 타 새신랑이자 나바르의 왕 앙리4세가 탈출에 성공했지요. 이제 개신교와 가톨릭의 진검승부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가톨릭의 또 다른 수장인 기즈공작 앙리를 포함해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 프랑스의 새 왕 앙리3세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언제까지 종교분쟁을 좌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점점 부를 늘려가는 상황에서 내전은 결국 제살 깎아먹기 처럼 느껴졌지요. 마침 1587년 개신교도를 이끈 나바르 앙리가 프랑스 가톨릭 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개신교와 타협이 불가피한 정치적 순간. 이를 가로막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극단적인 가톨릭교도였던 기즈 공작 앙리였습니다.
평화의 방해꾼 기즈공작을 제거하라
“기즈 공작을 궁에 들라 하라.”
왕 앙리 3세가 꾀를 냈습니다. 기즈 공작을 입궁시킨 뒤, 와인과 고기, 여인을 대접하지요.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였습니다. 술에 취한 기즈 공작이 앙리3세를 알현했을 때, 맞이한 건 중무장한 경비병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살해당하지요. 왕 앙리가 신하 앙리를 죽인 셈. 가톨릭과 개신교의 평화를 위해 암살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큰 권력은 언제나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불렀습니다. 가톨릭 광신도들은 왕 앙리3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자크 클레망이라는 22살의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프랑스 왕을 암살합니다. 기즈공작의 복수라는 명목. 앙리3세 역시 아들이 없이 떠났습니다. 발루아 왕조의 종말이었습니다. 두 앙리의 죽음으로 프랑스는 깊은 시름에 빠집니다. 왕위 계승자는 ‘개신교도’ 나바르의 왕 앙리4세 뿐이어서였습니다. 프랑스 위그노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환영했습니다만 가톨릭은 반란을 꾀하고 있었지요. 프랑스의 정치적 환경은 그야말로 ‘시계 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국가의 왕좌에 앉은 개신교 왕
“우리는 칼뱅주의 개신교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
앙리4세는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 역시 프랑스의 왕족 혈통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589년의 일. 그 유명한 ‘부르봉’왕가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더욱 분열합니다. 교황 식스투스 5세부터 “그는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스페인은 가톨릭 연맹을 결성해 프랑스를 공격할 태세를 갖췄지요. 대관식도 차일피일 미뤄집니다. 위대한 선택은 가장 위기의 순간에 나타납니다. 앙리4세가 신하들을 모아놓고 선언합니다. “짐은 오늘 가톨릭으로 개종하노라. 이와 동시에 프랑스 내에 위그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다.” 그 유명한 ‘낭트 칙령’이었습니다. 왕이 종교를 바꾸는 대신에 개신교 위그노의 안전까지 보장하는 놀라운 정치력이었지요이 역시 그의 내연녀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조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Paris vaut bien une messe”파리는 가톨릭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앙리 4세가 무릎을 꿇자, 프랑스가 다시 일어납니다.
부국의 길로 달려 나가는 프랑스
통합된 프랑스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국가 재정을 통합하고, 다리와 운하를 건설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름 난 퐁네프 다리를 건설한 것도 앙리 4세였습니다.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건설도 속도가 붙습니다. 현재 캐나다 퀘백이 불어를 쓰는 것도 앙리4세의 지원덕분이었지요. 그의 치세 하 왕정이 탄탄히 자리 잡은 덕분에 루이 14세와 같은 부르봉 절대왕정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학자들이 앙리4세를 Henri le Grand앙리 대왕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의 후손인 루이14세가 종교적 자유인 낭트칙령을 폐기하는 건 또 다른 아이러니지만요. ‘새 신부’ 마르가리트는 어떻게 지냈을까요. 앙리4세와 마르가리트의 혼인은 무효가 됩니다. 마르가리트가 불임임이 밝혀지면서 교황청이 두 사람의 혼인무효를 승인합니다. 두 사람은 그럼에도 여전히 쿨한 관계. 궁정에 머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요. 마르가리트가 자기 상속재산을 받을 사람으로 ‘루이13세’를 지명합니다. 루이13세는 앙리4세가 새 부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낳은 아이. 전 남편의 아이에게 상속재산을 남긴 셈입니다. 두 사람 관계가 얼마나 남다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 후로 프랑스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동화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610년, 또 다른 가톨릭 신자들이 광장에서 앙리 4세를 암살합니다. 프랑스는 그렇게 명군을 잃었지요. 광신자들이 국가를 좀먹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어떤 도그마에 빠진 것은 아닌지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네줄요약> ㅇ프랑스 앙리 4세는 ‘앙리 대왕’Le Grand으로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임금이다. ㅇ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해결한 존재여서다. ㅇ개신교도였던 그는 자신이 개종하는 대신, 개신교도들의 종교 자유를 보장낭트 칙령했다. ㅇ그는 와이프인 마르가리트를 두고 수 없이 바람을 피워 성병을 달고 살기도 했다. <참고문헌> ㅇ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2016년 ㅇ김충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종교정책, 종교적 자유의 길을 만들다,인문예술학회,2023년 ㅇ박효근, 위그노 정체성의 역사적 변화 - 16세기 종교내전에서 18세기 이민공동체의 형성까지, 한국프랑스사학회, 2015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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