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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내가 아직 세월호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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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46회 작성일 24-04-1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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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유족 김영주-인천평복 이광호 인터뷰 "세월호 희생자는 단원고 학생·교사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있었다" "여전히 더딘 진상규명…늦어지는 일상 회복" "평생 치료해야 할 사회적 참사…지원 끊겠다는 정부 유감" "떠나보낸 가족에는 감사하고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


"처음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동참하면 정부도 빨리 이유를 찾아줄 거라고 믿었는데 10년이 지났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지난 13일 인천시청에서 만난 김영주49 세월호 일반인 유가족협의회 부위원장은 세월호 참사 원인을 하루빨리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CBS노컷뉴스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인천추모문화제가 열린 지난 13일 이 행사를 주도한 김 부위원장과 이광호50 인천평화복지연대 사무처장 등을 만나 세월호 참사 10주기의 의미를 들어봤다.


인천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 가운데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을 제외한 일반인 사망자 43명을 추모하기 위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 있다. 김 부위원장은 이 추모관의 사무장을 맡고 있다. 이 사무처장은 2022년 세월호 참사 8주기 때부터 인천 지역 추모 행사의 실무 업무를 돕는 집행위원이다.

김 부위원장의 어머니는 2014년 자전거 동호회원들과 함께 제주도로 가던 세월호에 탑승했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김 부위원장은 사고 사흘째 되던 날 팽목항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마주했다.

이 과정에서 김 부위원장을 비롯한 일반인 희생자 가족들은 단원고 희생자들과 달리 시신을 수습할 구급차도 배정되지 않아 자비로 사설 구급차를 섭외해 장례를 치르는 등 소외감을 경험했다. 김 부위원장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회적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처럼 지원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광고회사 직원이었던 김씨는 애초 어머니 장례와 수습을 마치면 일상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정부의 사고 원인 규명이 늦어지자 뒤늦게 세월호 참사 관련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여전히 어머니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이유가 확인되면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그의 일상은 세월호 추모관에 출근하는 일로 시작된다. 이광호 사무처장은 김씨의 이런 선택에 대해 걱정을 드러냈다. 매일 아침 떠나보낸 가족이 있는 곳으로 출퇴근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게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반면 김씨는 이러한 우려에 대해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지만 아직 참사 원인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반박했다.

김씨는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배상금으로 얼마를 받았느냐"고 묻는 등 지나친 관심이 유족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면서도 참사 원인 규명과 앞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적인 사회적 재난을 막을 수 있도록 국민적인 관심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떠나보냈지만 10년째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서러움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유족들이 정부에게 요구하는 진실 규명과 안전사회 구축은 희생자 가족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유일한 방법이다.

이하는 김 부위원장과 이 사무처장과의 대화록.

기자이하 기 먼저 자기 소개를 해달라

이광호이하 이 인천평화복지연대에서 활동가로 지내고 있다. 특별히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과 인연이 된 건 3년 정도 됐다. 인천의 일반인 추모관에서 시민사회와 지역사회가 같이 운영위원회를 구성을 했다.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알게 됐고 지금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세월호 8~10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했다.

김영주이하 김 세월호 참사 일반인 유가족협의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처음에는 세월호와 관련한 활동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4·16재단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인천 세월호 참사 일반인 추모관의 사무장을 맡고 있다.

<기>기> 각 세월호를 접한 시작이 다를 것 같다. 세월호 참사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을 말해달라.

<이>이> 세월호 참사 당일 지인의 상갓집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처음 뉴스를 접할 때는 내가 관련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히 인천에서 배가 떠났고 인천 시민들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을 수습하는 해경 관계자가 있어 문의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그래서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뉴스가 바뀌었다. 나중에는 해경 관계자하고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전원 구조했다는 소식은 사실이 아니었고 우리가 뉴스 화면으로 보던 모습이 현실이었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김>김> 사고 당시를 떠올려보면 저희 어머니가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과 제주도에 방문하기로 돼 있었는데 그 자체를 몰랐다. 언제 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에서 TV 뉴스를 보면서도 단순히 "큰 사고가 났구나"라고 생각했지 그게 내 일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 친구 분한테 "어머니가 그 배에 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선사였던 청해진해운에 연락해 어머니가 세월호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팽목항으로 갔다. 내려가는 길에서도 뉴스에서는 전원 구조 소식이 나와서 괜찮을 거다라고 여겼다. 영화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졌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팽목항을 도착한 뒤 깨달았다. 현장은 정말 지옥같았다. 먼저 도착한 안산 단원고 학부모들은 저마다 아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찾는 상황이었다. 이어 상황본부가 차려진 진도체육관을 갔는데 거기는 팽목항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눈물바다였다. 단원고 학부모들의 경우 몇 반 누구 부모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곳에 모여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일반인은 학부모와 같은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고립됐다. 당시에 정말 답답했다. 내가 무능력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원고 희생자 가족들은 교육청이나 안산시청 등을 통해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지만 팔도에서 모인 일반인 희생자들은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이>이> 그때를 떠올려보면 희생자 가운데 인천 거주자를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방법도 없다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기>기> 한 마디로 무질서했다는 건데 그런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건 언제쯤이었나.

<김>김> 어머니 모시고 올라가는 그날까지도 그런 건 느끼지 못했다. 내 어머니는 참사 사흘 째 시신을 수습했다. 다른 희생자들보다 빨리 수습된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시신을 옮길 구급차도 없었다. 학생 희생자는 교육청이나 안산시청 등에서 미리 구급차를 마련해놨지만 일반인 희생자에게는 그런게 전혀 없었다. 일반인 희생자들은 스스로 구급차를 섭외해야 했다. 시신을 발견하는 대로 즉시 연고지로 옮기면 좋을텐데 "이 구급차는 단원고 학생 시신만 옮긴다"면서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다. 바로 옆에 구급차가 있는데도 따로 구급차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났다. 사실 지금도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결국 서울에서 구급차를 섭외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를 요구하든 얼마나 걸리든 최대한 빨리 어머니 시신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기>기> 가족을 잃었다는 점에서 모두 희생자인데, 유가족 사이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정부기관이나 지원기관의 시스템적 문제로 보인다.

<김>김> 맞다. 정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

<기>기> 정부가 희생자들 사이에서도 자녀를 떠나 보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눠서 차등 지원했다고 봐도 되는 건가

<김>김> 내가 느낀 것은 정부도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단원고 학부모들의 경우 교육청이라는 일관된 행정기관이 있었지만 일반인은 그렇지 못했다. 희생자의 주거지도 따로였고 유족의 주거지도 따로인 경우가 많았다. 희생자가 나온 지자체도 유족의 지자체도 모두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분위기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일반인 희생자들은 인천 17명, 경기 17명, 서울 5명, 제주 4명 등 모두 43명이었다. 이들이 한 동일한 거주자였다면 지원이 좀 수월했을 텐데 모두 지역별로 나눠진 상황이어서 앞장서서 일을 처리하는 곳이 없었다.

<기>기> 비교적 빠르게 장례를 치렀다. 이후 세월호 추모 등 관련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 이유가 있나

<김> 김>진상규명이라는 이유 한 가지였다. 처음에는 진상규명에 동참하면 정부도 빨리 이유를 찾아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게 10년이 지났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304명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됐는지 여지껏 밝혀내지 못했다. 외인설, 내인설 등 여러 설만 무성하다. 하나로 정리된 내용이 없다. 그게 제일 답답하다. 대통령기록물 등 여러 가지 자료들은 많다고 하는데 10년간 여러 조사기관이 나섰는데도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기>기> 이광호 위원장에게 궁금한 게 있다. 세월호 추모 행사를 돕고 있는데 행사를 준비하거나 일을 하면서 김 사무장에게 말하기 어려웠던 말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게 있나.

<이>이> 많다. 지금도 제일 궁금하고 앞으로도 해소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단원고 희생자들의 경우 단일한 추모 공동체가 만들어져 지내고 있다. 반면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은 같은 피해자인데도 추모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김 사무장은 세월호 일반인 추모관으로 매일 출퇴근하는 삶을 선택했다. 추모관의 관장과 사무장 모두 세월호 희생자 유족이다. 매일 희생자들을 떠올리는 괴로움이 있을 텐데 이게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일상이 이러면 안되는 게 아닌가. 보통 가족의 죽음을 겪으면 기일이나 명절 즈음에 추모하지 않나. 적어도 일상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매일 아침 돌아가신 부모나 가족이 있는 곳으로 출·퇴근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건 어떤 마음일지 가늠할 수 없다. 삶의 중압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늘 함께 있는 삶은 어떤지 늘 궁금했는데 함부로 묻기 어려웠다.

<김>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이런 생각을 처음 듣는다. 이광호 처장처럼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다. 물론 추모관을 지키는 건 힘들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나가는 건 진상규명이 이뤄진 뒤 생각해 보려고 한다.

<기>기>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어떤 생활을 했는가.

<김>김> 광고 회사를 다녔다. 평범한 가장이었다.

<기>기> 가족들과는 잘 지내는가.

<김>김>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데 쉽지 않다. 내가 4·16재단에 속해 있다 보니 더욱 그렇다. 나보다 가족들은 일상으로 조금 더 빨리 돌아간 게 아닌가 싶다.

<기>기> 자녀가 있는가.

<김>김> 딸 둘이 있다.

<기>기> 딸들하고 혹시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가

<김>김> 자주 못 나눈다. 딸들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말하면 운다. 할머니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한다. 대화가 길게 안된다. 될 수 있으면 길게 말하지 않고 기일 같을 때만 잠시 추모관에 가자고 하는 정도다. 딸 아이들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말하는 건 아니지만 간혹 "너 세월호 유가족이잖아"라는 말을 들으면 힘들다고 하더라. 참사 당시 큰 딸은 10살이었다. 딸은 그때 너무 슬픈데 친구들은 마치 자기를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이 지내다 보니 지금은 유가족이 아닌 것처럼 지내라고 말한다.

<기>기>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단어가 단순하게 그 단어 뜻을 넘어서 필요 이상으로 당사자에게 상처를 주는 구조가 있다고 보는 건가.

<이>이>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생각은 그동안 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등 다른 참사 피해자들이 비슷한 얘기를 했다.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거나 유가족일 경우에 이것이 온전히 그대로 이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왜곡된 의미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항상 존재했다고 하더라. 그러다 보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누군가에게 편하게 털어놓고 나누면서 해결하는 사회적 관계나 제도, 문화 이런게 전혀 형성돼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 역시 그런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참사를 겪은 당사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하는 제도나 권리 이런 것들이 빈약하는 생각도 든다.

<기>기> 그동안 서운하거나 마음 아프게 했던 말이 있었는가. 있으면 어떤 말이었나.

<김>김> 대표적인 게 한 가지 있다. 세월호 배상금 얼마 받았느냐는 질문이다. 주변 친척이나 지인 등 예외없이 묻더라. 심지어 다짜고짜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많이 힘드냐" 등 위로의 말이 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았다. 배상금을 얼마나 받았는지 왜 궁금할까. 직접 물어볼 필요가 있는 질문인가 싶다. 다행히 지금은 예전만큼 그런 질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 같다. 조금 더 독해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기>기>
반대로 마음을 녹여주거나 위로해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가.

<김>김> 오히려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게 더 위로가 됐던 것 같다. 특히 가족들. 지금까지 경제활동도 제대로 안하고 참사 원인 규명하는 일에 집중하는데 아내가 흠을 잡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게 제일 고맙다.

<기>기>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는 게 가장 좋다는 의미인가.

<김>김> 이미 안 좋은 일이 크게 벌어졌는데 무턱대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맞는 건 아닌 거 같다. 대답이 어렵다.

<기>기> 참사를 겪은 뒤 바뀐 것들이 있는가

<김>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집에 있던 아버지가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여태껏 입원해 계신다. 그동안 세월호 피해자에게 제공했던 의료지원 덕분에 그나마 돌봐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지원이 끊긴다. 최근에 아버지가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사회적 재난에 따른 지원을 기한을 두고 제공하는 건 불합리한 것 같다. 트라우마 치료 등 심리 치료도 마찬가지다. 이건 마치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10년간 지원했으니 이제 괜찮죠. 지원 끊을게요"라고 말하는 것이지 않나.

<이>이>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해외 다른 나라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해외 국가에서는 사회적 재난에 대해 거의 평생 의료지원을 한다던지 삶에 대한 후속 대책들을 마련해 놓고 지원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기한을 정해놓고 연장하는 방식이어서 논란이 반복되는 것 같다. 법 개정을 통해 이 부분을 잘 고쳐나가야 한다고 본다. 사회적 참사의 회복을 개인이 해결하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논의가 지속돼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기>기> 내일 당장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김>김>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참사 이후 그동안 늘 내가 힘든 이야기만 했었다. 그러면서 정작 어머니에게 어떤 말을 할지 생각하는 기회가 없었다. 내가 세상에 나와 살고 있는 존재의 이유가 어머니였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감사하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기>기> 다른 유가족 또는 사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김>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이어주길 소망한다. 유가족에게 4월은 그나마 사람 냄새가 나는 계절이다. 평소에는 관심이 없지만 4월이 되면 메스컴도 국민들도 관심을 가져주신다. 마치 "그동안 잘 지냈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유족들은 4월을 겨울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은 얼어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유족들에게 애정어린 관심을 드러내주는 건 큰 힘이 된다. 또 간혹 세월호 참사를 마치 단원고 참사로 기억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세월호 희생자 중에는 단원고 학생과 교사뿐만 아니라 승무원과 일반인들의 희생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단원고 희생자 유족과 달리 일반인 희생자 유족들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공동체조차 부족해 더욱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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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이준석 기자 ljs@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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