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신혜씨41가 2019년 5월 20일 오후 전남 해남군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에서 첫 재심 공판을 마친 뒤 호송되고 있다. 김씨는 이날 공판에서 "자신이 친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면서 "위조된 자료로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다.. 2019.5.20/뉴스1 ⓒ News1 한산 기자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을까, 고모부 말을 한쪽 귀로 흘려 버렸으면 어땠을까, 왜 완도에 왔다고 거짓말했을까.
24년째 이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탓하고 있는 이가 있다.
그는 사상 첫 재심 결정을 받아낸 무기수 김신혜47 씨로 구속되는 순간부터 24년이 흐른 지금까지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 24년째 옥살이 김신혜 사건, 그 시작은 언니 어디야
24년 전 오늘 새벽 5시 50분, 전라남도 완도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5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숨진 남성은 사고 현장에서 7㎞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 3급 김모52 씨였다.
경찰은 시신 주변에 깨진 자동차 라이트 조각 등이 있는 것으로 봐 뺑소니 교통사고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신 부검 결과 수면유도제인 독실아민이 상당량13.02㎍/ml 검출되자 교통사고가 아닌 살인, 강력사건으로 전환했다.
이때 숨진 김 씨의 매제가 처남의 큰딸이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털어놓더라며 경찰에 신고, 3월 9일 새벽 경찰은 김 씨의 큰딸 김신혜당시 23세 씨를 존속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김신혜 씨는 사건이 일어날 시각 완도에 없었다고 알리바이를 댔지만 사건 당일 새벽 1시 무렵 통화한 여동생이 "언니 지금 어디야"라는 물음에 "응 완도 검문소 앞이야"라고 한 말에 발목이 잡혔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 씨 사건을 다룬 2015년 8월 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SBS 갈무리
◇ 아버지가 여동생 강간, 자신도 성추행 피해, 아버지 이름으로 보험 8개 가입
경찰 수사는 착착 진행돼 누가 봐도 김신혜가 범인이라는 정황 증거를 제시했다.
경찰은 △ 김 씨 고모부의 조카가 내가 범인이요라고 하더라는 말 △ 사건 발생 두 달 전 여동생이 아버지로부터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에 김 씨가 분노 △ 김신혜도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성추행당했다는 주변인 진술 △ 아버지 이름으로 보험을 무려 8개, 8억 원대 보험을 든 점 등을 내밀었다.
김신혜 씨는 경찰 수사와 재판 과정 내내 "아버지로부터 성추행당한 적 없다"고 해당 부분을 완강히 부인했다.
◇ 金 "고모부의 남동생이 죽인 것 같다 말에 뒤집어쓰기로"→ 고모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경찰은 "딸들에게 성폭력을 한 부친을 곱게 보지 않았던 김신혜 씨가 거액의 보험금을 타 내려고 수면유도제 30알이 든 술을 간에 좋은 약이라며 마시게 한 뒤 자신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던 중 아버지가 쓰러지자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 숨진 아버지를 내려놓고 교통사고로 위장한 뒤 현장을 떠났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이 김신혜 씨를 범인으로 특정한 건 큰조카로부터 범행 사실을 들었다는 고모부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반면 김 씨는 "고모부가 너 남동생이 죽인 것 같다고 해 동생을 대신해 내가 감옥에 가겠다고 했을 뿐"이라며 결코 고모부에게 "내가 죽였다고 말한 적 없다"고 맞섰다.
또 김 씨는 "아버지가 딸을 성추행했다는 파렴치범으로 몰려선 안 된다"며 "그런 사실 없다"고 경찰 수사 결과를 부정했다.
친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씨가 2015년 7월 공개한 자신의 옥중 메모. 재심을 청구한 김씨는 법원의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 제공 2015.7.8/뉴스1 ⓒ 뉴스1
◇ 1심, 2심에 이어 대법원도 무기징역…김신혜 "경찰 강압수사, 난 무죄" 옥중 투쟁
1,2심은 △ 인륜을 저버린 점 △ 보험금을 노린 것으로 보이는 점 △ 사건 당시 알리바이가 없는 점 △ 정상을 참작할 만한 사유성폭력 피해 등가 없는 점 등을 들어 김신혜 씨에게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김신혜 씨는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2001년 3월, 2심 결정에 잘못이 없다며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이후 김 씨는 "나는 억울하다. 경찰이 자백을 강요했다"며 교도소 내 노역을 거부하고 투쟁에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노트, 속옷, 양발 등 가리지 않고 사건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 여러 언론에 등장한 무기수 김신혜…변협 나선 끝에 재심 인용, 무기수 첫 사례
김신혜 사건은 2001년 6월 1일 SBS 시사프로그램 뉴스추적, 2003년 10월 21일 MBC PD수첩, 신동아 2003년 10월호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외부로 알려졌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이를 중시해 재심 여부가 가능한지 검토에 들어간 끝에 경찰이 적법한 압수수색 영장 없이 주거지 및 차량 수색 등의 문제점을 확인했다.
그러던 중 2015년 8월 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힘입어 2015년 11월 18일 광주지방법원은 재심 청구를 받아 들였다. 복역 중인 무기수에게 재심 결정이 내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찰이 항고했지만 2018년 9월 28일 대법원이 재심 개시를 최종 확정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23년째 복역중인 김신혜 씨가 지난해 6월 28일 오전 재심 재판 준비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으로 호송되고 있다. 2023.6.28/뉴스1 ⓒ News1 최성국 기자
◇ 재심도 우여곡절…변호인 교체, 재판부 기피신청 등 5년간 선고 지연
김신혜 씨 재심은 2019년 3월 광주지법 해남지원에서 시작됐지만 김 씨 측이 변호인 해임 및 교체, 국선 변호인 선임 취소, 재판부 기피신청으로 공전에 공전을 거듭 중이다.
2023년 5월엔 재심 전문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가 김 씨의 법률 대리인으로 나서 재심에 속도가 붙어 6차례 진행됐으나 김 씨가 박 변호사마저 해임하는 바람에 지난 연말 중단됐다.
올해 들어 다시 재심 공판이 재개됐지만 선고까지는 시일이 소요될 전망이다.
◇ 수면유도제 치사량은 100알, 그런데 30알?…보험가입 2년이 안 돼 수령 불가
김신혜 씨 측이 무죄를 주장하는 이유는 크게 3가지.
첫째 고모부로부터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는 것이다. 남동생에게 해가 미칠까 싶어 얼떨결에 내가 그랬다식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모부는 지난해 9월 4일 재심 공판에서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며 조카로부터 내가 그랬다는 말을 들었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둘째 경찰이 수면유도제 30알로 살해했다고 했는데 법의학자들에 따르면 수면유도제 치사량은 100알 정도로 경찰 수사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부검결과 김 씨 아버지가 다량의 약물을 복용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점도 내세우고 있다.
셋째 보험금을 노린 존속살인이라고 했는데 아버지 명의의 보험 8개 중 3개는 당시 해지 상태였고 나머지도 가입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수령 자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보험금을 노린 살인이라는 수사당국 논리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2020년 12월 17일 오후 수원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후 감격하고 있다. 2020.12.17/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 20년 억울한 옥살이 윤성여 재심 무죄…위자료 40억원
만약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다면 김신혜 씨는 가장 오랫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화성연쇄 살인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 씨는 2019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모두 40억 원에 이르는 위자료를 받았다.
이는 형사 보상금 25억1700만 원, 국가 배상금 18억 7000만원이다.
이밖에 법원은 국가가 아들을 억울한 살인자로 만든 책임을 물어 고인이 된 윤 씨 아버지에게 2억 원, 형제자매 2명에게 각각 50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김신혜 씨가 무죄로 풀려나면 윤성여 씨를 뛰어넘는 위자료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buckba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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