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대로 길바닥서 3년5개월, 목숨 건 70대 노인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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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현2구역 재건축단축 철거민 이종열씨 이야기
[우혜림 기자]
주여, 저마다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소유하지>
시인 릴케는 이렇게 기도했다. 생명체라면 응당 자기만의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인데도 릴케는 굳이 고유한 죽음을 신에게 간구했다. 그 참뜻은 이어진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들인 삶에서 나오는 죽음을 주소서. 여기서 죽음은 생명체의 소멸이 아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든, 삶의 연장선이자 최종적 형태로서의 죽음이다.
서울시 마포구 신촌로 대로변. 이곳에 한 세기 전 시인과 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마포더클래시라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한, 아현2구역 재건축단지의 철거민 이종열76씨다. 지난 4일, 고층 아파트 아래 위치한 공사장 가림막은 그가 쓴 글들로 빼곡하다. "내가 태어나 평생 살던 곳에서 세상 떠나는 것"이 목표라는 그의 보금자리는 1톤짜리 트럭 하나. 이씨는 2021년 5월 11일부터 3년 5개월간 이 길바닥을 묫자리 삼아 싸우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현은 밀려난 사람들의 동네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은 움집에 모여 살던 도시 빈민들을 아현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한국전쟁 이후 급증한 피난민들이 아현으로 몰려 무허가촌을 이루기도 했다. 면적에 비해 사는 사람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시장과 학교가 생기고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섰다. 종열씨의 조부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3대가 한 집에서 나고 자란 셈이니, 그에게 아현동 근방은 평생의 나와바리였다. 이곳에서 그는 숱한 노동을 거쳐왔다.
"난 저기염리동 한서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전쟁 끝나고 어려운 시절에 그때부터 별의별 걸 다 해봤어. 구두닦이하고 신문도 팔아보고. 졸업하고 나서는 아현역 옆에 한국 후로링 타일 공업사라고 마루판 만드는 공장을 다녔어요. 내가 죽기 전까지 안 잊어버리는 게 군번, 내 이름, 그리고 첫 회사 이름이잖아. 하여간 어릴 때부터 밑바닥에서 별 걸 다했지."
1965년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전후 20세 미만 소년가장은 1만 3000여 명으로 8084명이 구두닦이 일을 했다. 그중 한 명이 종열씨였다. 구두닦이를 하며 종열씨는 자리다툼으로 깡패에게 맞기도 하고 신문팔이를 하는 애들과 노점에서 값싸게 파는 오래된 빵을 나눠 먹기도 했다. "창피스러운 일"을 한다는 설움과 배고픔을 견디면서도 차마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배우고 싶다라는 갈망이었다.
"남들은 교복 입고 책가방 들고 다니는데 나는 구두통 들고…. 생각해봐요. 그걸로 돈을 얼마나 벌겠어. 근데도 벌어보겠다고... 나는 그냥 학교를 다니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배움을 열망하던 종열씨는 열다섯에 남산고등공민학교에 갔다. 고등공민학교는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청소년들이 다니던 야간 학교다. 방학 기간에 그는 공장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쥐를 잡거나 군밤을 구울 때 쓰이는 철망을 엮는 일을 했다. 개학 후 등교를 위해 일찍 퇴근시켜달라고 했더니 공장주가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종열씨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 갈팡질팡하면서…. 아유, 아직도 눈물이 나. 그래도 그때 잠깐 학교 맛을 본 게 참 감사하지."
- 뭐가 제일 좋으셨어요?
"그때 여기에서 양화대교까지 마라톤을 했어요. 내가 3등했잖아.웃음 신문 팔 땐 그저 물건 들고 빨리 뛰는 놈이 장땡이었거든. 그리고 당시 음악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나한테 노래 잘한다고하셨어. 신문 팔 때 하도 소리를 많이 지르고 다녀서 목청이 또 좋아.웃음 근데 나는 내가 아예 모르는 게 잘한 것 같아요. 뭘 많이 알고 그랬으면 건방지고 못 됐을 거야. 나 잘났다고 못된 짓하고 남 무시하고 그랬을 테니까."
십 대 때 친구에게 갚지 못한 돈을 못내 잊지 못하는 사람, 남에게 못된 짓을 하기 싫어 차라리 모르고 산 것이 다행이라는 사람, 마음 여린 사람인 그는 동시에 싸우는 사람이었다.
"내가 85년도에 종이 만드는 제조회사에서 운송 기사를 했어요. 근데 회사에서 갑자기 개인 자가용을 가지고 영업하겠다는 겁니다. 그때 일하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용역으로 비용을 적게 돌리려고 한 거죠. 그래서 내가 싸웠어요. 용역들 운행을 못하게 막고 주도적으로 그렇게 했어. 내가 근방 인쇄소들은 쫙 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본부장이 와서는 피해 안 가게 하겠다고 해놓고는 나한테만 배차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뒀죠."
2006년 아현2구역이 재건축단지로 지정되었을 때 종열씨가 싸움을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협조해달라는 재건축조합의 요청에 그는 "나쁜 짓 하기 싫다"라고 답했다.
"아현2구역 재건축이 잘못됐다는 건 국토부도 시도 구청도 다 알아요. 여기가 왜 재건축지역이에요. 재개발 지역이지. 쉽게 말해 천 평 땅이 있다고 쳐요. 거기에 아파트를 새로 짓겠다는 건데, 여기 사람들은 땅이 한 평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분양받을 만큼의 소유권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럼 조합에서 재건축을 할 게 아니라 정부나 공공기관에 맡겨야 할 거 아니에요. 거기서 돈 있는 사람, 가진 땅이 넓은 사람은 분양권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아닌 사람은 임대주택에 입주하게 해야죠. 그게 내가 하는 말의 전부에요."
종열씨가 살던 아현2구역은 기반 시설이 열악하고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단독주택 마을이었다. 대다수 가옥주들은 50년 이상 장기 거주한 노인층이었고, 세입자들은 저렴한 주거비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2003년 아현동과 염리동 일대가 뉴타운지구로 지정됐을 때도 2구역은 존치 구역이었다. 재정비할 필요성이 낮아 그대로 둔다는 뜻이다. 하지만 3년 뒤 슬럼화 우려를 이유로 재건축 대상 지역이 되었다. 뉴타운 광풍이 일면서 재개발·재건축을 포함한 도시정비사업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도시 및 주거 환경 정비법도시정비법에 따라 재개발 사업은 기반 시설 정비라는 공익적 성격이 인정돼 최소한의 세입자 대책을 보장해야 한다. 반면 재건축 사업은 민간사업으로 간주해 공공의 역할이 의무화되어 있지 않다. 아현2구역엔 2 357가구가 살았다. 이곳에 1 419세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재정착하지 못한 가구는 쫓겨난다는 뜻이었다.
아현2구역 재건축조합은 관리처분 인가가 내려진 2016년 6월 이후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시행 인가 조건에는 강제집행 사전 통보 원칙이 있었다. 또한 서울시가 2018년 5월 발표한 정비사업 강제철거 예방 종합대책에 따라 강제집행은 시·구청 공무원과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인권지킴이단 참관하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재건축조합은 이러한 조건들을 여러 차례 어겼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용역이 시도 때도 없이 막 들이닥치니까 사람들이 일도 그만두고 집을 지키고 그랬어요. 나는 막 3층 높이 되는 곳에 올라가서 용역들 오면 뛰어내린다고 하고 그랬어. 2018년 겨울에는 비가 엄청 많이 쏟아지는데 6시간을 지키고 그랬어요. 근데 할 수가 없지. 나이 70, 80 먹은 사람들이 어떻게 싸워. 근데 이게 법이래."
청년들로 이루어진 용역들이 60대부터 90대까지의 노인들을 이불로 말아 들고나왔다. 그리고 대형 쇠망치와 쇠지렛대로 유리창과 문을 부쉈다. 그 다음엔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오물을 뿌리고 소화기를 분사했다. 붉은 쇠파이프로 철창을 만들어 현관문을 막았다. 갈비뼈가 부러진 주민도, 실신한 주민도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폭력을 멈춘 것은 죽음이었다. 2018년 12월 4일, 아현2구역의 세입자였던 박준경 씨당시 37세가 한강 망원유수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광고전단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세 번의 강제집행으로 모두 뺏기고 쫓겨나 이 가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 사흘간 추운 겨울을 길에서 보냈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합니다." 2009년 1월 20일 일어난 용산참사 10주기를 한 달 정도 앞둔 시기였다. 준경씨의 이름을 대자, 종열씨는 바로 그의 기일을 읊었다.
"잊을 수가 없죠, 그런 일은. 이해가 안 가요. 걔박준경 씨가 왜 죽어야 했는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해. 걔는 세입자였어요. 집 뺏기고 날은 쌀쌀해지지, 찜질방, 피시방 다니는데 돈은 떨어지지…. 그러니까 돈 몇 푼만 줬으면 될 거 아니에요."
준경씨의 죽음 이후 12월 7일 마포구청은 아현2구역 재건축공사를 전면 중지했다. 2019년 1월 9일 서울시와 마포구는 박씨 유족과 재개발 사업 지구에 남은 세입자 가족들에 임대주택을 지원하는 방안 등을 협의체와 합의했다. 하지만 재건축 사업 세입자에 대한 보상 규정이 없는 도시정비법 개정은 없었다. 강제집행 시 거주민들의 인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도록 하는 강제퇴거금지법은 18·19·20대 국회 모두에서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모든 동물이, 살아있는 동물이 보금자리를 약탈당하면 가만히 있나요? 더군다나 태어나서 평생 산 집인데. 3대가 같이 산 집인데. 이런 집이 흔해요? 우리나라가 참 웃긴 나라예요. 부동산이 노름판이 되었잖아. 내가 무식해도 이건 알아요. 사람들이 집을 빨리 팔려고만 하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하니까 이제는 터전을 마련하겠다는 개념이 없어요. 여기가 내 보름자리다. 우리가 여기서 안전하게 살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돈 놓고 돈 먹기지. 이게 노름판이지 뭐예요."
서울시와 박씨 유족의 합의 이후 아현2구역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재건축조합은 종열씨를 포함한 가옥주들 앞으로 공탁금을 맡겼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종열씨 앞으로 매겨진 공탁금은 2억 7700만 원이었다. 당시 주택 실거래가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텐트를 치고 싸우던 종열씨는 2018년 12월 은평구 불광로의 반지하 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자꾸 두고 온 진짜 집이 떠올랐다. 그런 와중 2016년 6월 9일재건축 사업 고시 일자부터 2018년 11월 5일공탁 일자까지 동안 종열 씨가 집을 점유해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내가 내 집에서 산 것이 부당이득이래요. 내가 법적 근거 없이 무리한 보상을 요구했다는데, 내가 뭔 무리한 요구를 해요? 내 땅과 집이 필요하면 적어도 내가 살던 집만큼의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달라는 거예요. 그게 뭐가 잘못된 건데요. 이게 상식적이에요? 이게 정의로운 나라냐고요."
이삿짐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가던 종열씨는 결국 2021년 5월 11일, 다시 아현으로 왔다.
- 왜 다시 돌아오신 것 같으세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늙어도 사람답게 남은 인생을 잘 마무리하자는 거예요. 내가 편하고 내가 잘 먹고 잘 사려고 온 거지. 사실 죽으려면야 약이라도 먹고 죽을 수 있죠. 근데 할 게 있어. 그냥은 안 죽어."
- 할 게 뭔데요?
"저기 써 있잖아요.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데요."
- 싸움이요?
"그래. 그러면 이겨야죠. 여태까지 왜 싸웠어요. 불의와 싸운 거예요. 불의. 이 상황이 정당한 것이냐고. 불교에서 그래요.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고통의 바닷속에서 산다 이거야. 여기서 나 혼자 전기도 없고 물도 없지만 뭐 어때요. 심심하면 술 한 잔 먹고 노래도 부르고. 여기는 내 카페야.웃음"
- 가족 분들이 그립진 않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금 손주들이 9살, 8살, 5살이에요. 근데 보면 안 되는 게, 한 번 보면 자꾸 봐야 해.웃음"
종열씨는 지난해 4월 4일 아내와 이혼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2억 원 정도의 합의금을 송금했다. 최근에는 따로 보관해 둔 세간살이를 지인에게 부탁해 장애인 복지관 등에 기부했다. 틈이 나면 생각들을 정리해 공책에 기록한다던 종열씨는 요즘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
"이제 한계가 온 것 같아요. 요즘은 화가 나기보다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에요. 뭘요? 숨 쉬는 거. 숨 쉬는 걸 끝내려고. 나 스스로 계속 말해요. 이제 가자. 그만 가자. 근데 아직 미련이 남았나 봐. 전에는 드문드문 생각했거든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사실 그만두려면야 다 정리하고 어디 가서 혼자 살 수도 있죠. 근데 그럴 거였으면 진즉에 시작도 안 했지. 나는 이제 나와 싸워요. 그렇게 생각해요."
- 선생님 삶이 어떻게 기록되길 바라세요?
"그런 건 원하지 않아. 그냥 내가 태어난 곳에서 떠나면 돼. 그게 내 목표."
오는 12월 4일이면 아현2구역 세입자였던 박준경씨의 6주기다. 그리고 그다음 달 1월 20일은 용산참사 15주기다. 수많은 저마다 고유한 죽음이 이 땅에 있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들인 삶에서 나오는 죽음을 주소서라고 노래하던 시인처럼, 의미 없는 삶이 아닌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그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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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혜림 기자]
주여, 저마다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소유하지>
시인 릴케는 이렇게 기도했다. 생명체라면 응당 자기만의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인데도 릴케는 굳이 고유한 죽음을 신에게 간구했다. 그 참뜻은 이어진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들인 삶에서 나오는 죽음을 주소서. 여기서 죽음은 생명체의 소멸이 아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든, 삶의 연장선이자 최종적 형태로서의 죽음이다.
서울시 마포구 신촌로 대로변. 이곳에 한 세기 전 시인과 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마포더클래시라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한, 아현2구역 재건축단지의 철거민 이종열76씨다. 지난 4일, 고층 아파트 아래 위치한 공사장 가림막은 그가 쓴 글들로 빼곡하다. "내가 태어나 평생 살던 곳에서 세상 떠나는 것"이 목표라는 그의 보금자리는 1톤짜리 트럭 하나. 이씨는 2021년 5월 11일부터 3년 5개월간 이 길바닥을 묫자리 삼아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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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열씨가 공사장 가림막에 쓴 글. 그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
ⓒ 우혜림 |
역사적으로 아현은 밀려난 사람들의 동네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은 움집에 모여 살던 도시 빈민들을 아현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한국전쟁 이후 급증한 피난민들이 아현으로 몰려 무허가촌을 이루기도 했다. 면적에 비해 사는 사람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시장과 학교가 생기고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섰다. 종열씨의 조부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3대가 한 집에서 나고 자란 셈이니, 그에게 아현동 근방은 평생의 나와바리였다. 이곳에서 그는 숱한 노동을 거쳐왔다.
"난 저기염리동 한서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전쟁 끝나고 어려운 시절에 그때부터 별의별 걸 다 해봤어. 구두닦이하고 신문도 팔아보고. 졸업하고 나서는 아현역 옆에 한국 후로링 타일 공업사라고 마루판 만드는 공장을 다녔어요. 내가 죽기 전까지 안 잊어버리는 게 군번, 내 이름, 그리고 첫 회사 이름이잖아. 하여간 어릴 때부터 밑바닥에서 별 걸 다했지."
1965년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전후 20세 미만 소년가장은 1만 3000여 명으로 8084명이 구두닦이 일을 했다. 그중 한 명이 종열씨였다. 구두닦이를 하며 종열씨는 자리다툼으로 깡패에게 맞기도 하고 신문팔이를 하는 애들과 노점에서 값싸게 파는 오래된 빵을 나눠 먹기도 했다. "창피스러운 일"을 한다는 설움과 배고픔을 견디면서도 차마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배우고 싶다라는 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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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9월 21일자 동아일보좌, 7월 27일자 경향신문우 한국 후로링 타일 공업사 광고좌와 가두 소년소년 가장 실태 보도우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남들은 교복 입고 책가방 들고 다니는데 나는 구두통 들고…. 생각해봐요. 그걸로 돈을 얼마나 벌겠어. 근데도 벌어보겠다고... 나는 그냥 학교를 다니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배움을 열망하던 종열씨는 열다섯에 남산고등공민학교에 갔다. 고등공민학교는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청소년들이 다니던 야간 학교다. 방학 기간에 그는 공장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쥐를 잡거나 군밤을 구울 때 쓰이는 철망을 엮는 일을 했다. 개학 후 등교를 위해 일찍 퇴근시켜달라고 했더니 공장주가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종열씨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 갈팡질팡하면서…. 아유, 아직도 눈물이 나. 그래도 그때 잠깐 학교 맛을 본 게 참 감사하지."
- 뭐가 제일 좋으셨어요?
"그때 여기에서 양화대교까지 마라톤을 했어요. 내가 3등했잖아.웃음 신문 팔 땐 그저 물건 들고 빨리 뛰는 놈이 장땡이었거든. 그리고 당시 음악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나한테 노래 잘한다고하셨어. 신문 팔 때 하도 소리를 많이 지르고 다녀서 목청이 또 좋아.웃음 근데 나는 내가 아예 모르는 게 잘한 것 같아요. 뭘 많이 알고 그랬으면 건방지고 못 됐을 거야. 나 잘났다고 못된 짓하고 남 무시하고 그랬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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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열 씨의 수첩. 트럭에서 하루를 보내며 그는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두곤 한다. |
ⓒ 우혜림 |
십 대 때 친구에게 갚지 못한 돈을 못내 잊지 못하는 사람, 남에게 못된 짓을 하기 싫어 차라리 모르고 산 것이 다행이라는 사람, 마음 여린 사람인 그는 동시에 싸우는 사람이었다.
"내가 85년도에 종이 만드는 제조회사에서 운송 기사를 했어요. 근데 회사에서 갑자기 개인 자가용을 가지고 영업하겠다는 겁니다. 그때 일하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용역으로 비용을 적게 돌리려고 한 거죠. 그래서 내가 싸웠어요. 용역들 운행을 못하게 막고 주도적으로 그렇게 했어. 내가 근방 인쇄소들은 쫙 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본부장이 와서는 피해 안 가게 하겠다고 해놓고는 나한테만 배차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뒀죠."
2006년 아현2구역이 재건축단지로 지정되었을 때 종열씨가 싸움을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협조해달라는 재건축조합의 요청에 그는 "나쁜 짓 하기 싫다"라고 답했다.
"아현2구역 재건축이 잘못됐다는 건 국토부도 시도 구청도 다 알아요. 여기가 왜 재건축지역이에요. 재개발 지역이지. 쉽게 말해 천 평 땅이 있다고 쳐요. 거기에 아파트를 새로 짓겠다는 건데, 여기 사람들은 땅이 한 평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분양받을 만큼의 소유권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럼 조합에서 재건축을 할 게 아니라 정부나 공공기관에 맡겨야 할 거 아니에요. 거기서 돈 있는 사람, 가진 땅이 넓은 사람은 분양권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아닌 사람은 임대주택에 입주하게 해야죠. 그게 내가 하는 말의 전부에요."
종열씨가 살던 아현2구역은 기반 시설이 열악하고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단독주택 마을이었다. 대다수 가옥주들은 50년 이상 장기 거주한 노인층이었고, 세입자들은 저렴한 주거비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2003년 아현동과 염리동 일대가 뉴타운지구로 지정됐을 때도 2구역은 존치 구역이었다. 재정비할 필요성이 낮아 그대로 둔다는 뜻이다. 하지만 3년 뒤 슬럼화 우려를 이유로 재건축 대상 지역이 되었다. 뉴타운 광풍이 일면서 재개발·재건축을 포함한 도시정비사업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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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별 도시정비사업 지구 개수 추이 2005~2014년 10년간 재개발과 재건축을 포함한 도시정비사업의 지구 개수 추이. |
ⓒ 통계청 |
도시 및 주거 환경 정비법도시정비법에 따라 재개발 사업은 기반 시설 정비라는 공익적 성격이 인정돼 최소한의 세입자 대책을 보장해야 한다. 반면 재건축 사업은 민간사업으로 간주해 공공의 역할이 의무화되어 있지 않다. 아현2구역엔 2 357가구가 살았다. 이곳에 1 419세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재정착하지 못한 가구는 쫓겨난다는 뜻이었다.
아현2구역 재건축조합은 관리처분 인가가 내려진 2016년 6월 이후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시행 인가 조건에는 강제집행 사전 통보 원칙이 있었다. 또한 서울시가 2018년 5월 발표한 정비사업 강제철거 예방 종합대책에 따라 강제집행은 시·구청 공무원과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인권지킴이단 참관하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재건축조합은 이러한 조건들을 여러 차례 어겼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용역이 시도 때도 없이 막 들이닥치니까 사람들이 일도 그만두고 집을 지키고 그랬어요. 나는 막 3층 높이 되는 곳에 올라가서 용역들 오면 뛰어내린다고 하고 그랬어. 2018년 겨울에는 비가 엄청 많이 쏟아지는데 6시간을 지키고 그랬어요. 근데 할 수가 없지. 나이 70, 80 먹은 사람들이 어떻게 싸워. 근데 이게 법이래."
청년들로 이루어진 용역들이 60대부터 90대까지의 노인들을 이불로 말아 들고나왔다. 그리고 대형 쇠망치와 쇠지렛대로 유리창과 문을 부쉈다. 그 다음엔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오물을 뿌리고 소화기를 분사했다. 붉은 쇠파이프로 철창을 만들어 현관문을 막았다. 갈비뼈가 부러진 주민도, 실신한 주민도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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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현2구역 재건축 전후 모습 2014년좌와 2024년우의 모습 변화. |
ⓒ 네이버 로드뷰 |
폭력을 멈춘 것은 죽음이었다. 2018년 12월 4일, 아현2구역의 세입자였던 박준경 씨당시 37세가 한강 망원유수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광고전단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세 번의 강제집행으로 모두 뺏기고 쫓겨나 이 가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 사흘간 추운 겨울을 길에서 보냈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합니다." 2009년 1월 20일 일어난 용산참사 10주기를 한 달 정도 앞둔 시기였다. 준경씨의 이름을 대자, 종열씨는 바로 그의 기일을 읊었다.
"잊을 수가 없죠, 그런 일은. 이해가 안 가요. 걔박준경 씨가 왜 죽어야 했는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해. 걔는 세입자였어요. 집 뺏기고 날은 쌀쌀해지지, 찜질방, 피시방 다니는데 돈은 떨어지지…. 그러니까 돈 몇 푼만 줬으면 될 거 아니에요."
준경씨의 죽음 이후 12월 7일 마포구청은 아현2구역 재건축공사를 전면 중지했다. 2019년 1월 9일 서울시와 마포구는 박씨 유족과 재개발 사업 지구에 남은 세입자 가족들에 임대주택을 지원하는 방안 등을 협의체와 합의했다. 하지만 재건축 사업 세입자에 대한 보상 규정이 없는 도시정비법 개정은 없었다. 강제집행 시 거주민들의 인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도록 하는 강제퇴거금지법은 18·19·20대 국회 모두에서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모든 동물이, 살아있는 동물이 보금자리를 약탈당하면 가만히 있나요? 더군다나 태어나서 평생 산 집인데. 3대가 같이 산 집인데. 이런 집이 흔해요? 우리나라가 참 웃긴 나라예요. 부동산이 노름판이 되었잖아. 내가 무식해도 이건 알아요. 사람들이 집을 빨리 팔려고만 하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하니까 이제는 터전을 마련하겠다는 개념이 없어요. 여기가 내 보름자리다. 우리가 여기서 안전하게 살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돈 놓고 돈 먹기지. 이게 노름판이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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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열씨75가 인터뷰 중이다. |
ⓒ 우혜림 |
서울시와 박씨 유족의 합의 이후 아현2구역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재건축조합은 종열씨를 포함한 가옥주들 앞으로 공탁금을 맡겼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종열씨 앞으로 매겨진 공탁금은 2억 7700만 원이었다. 당시 주택 실거래가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텐트를 치고 싸우던 종열씨는 2018년 12월 은평구 불광로의 반지하 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자꾸 두고 온 진짜 집이 떠올랐다. 그런 와중 2016년 6월 9일재건축 사업 고시 일자부터 2018년 11월 5일공탁 일자까지 동안 종열 씨가 집을 점유해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내가 내 집에서 산 것이 부당이득이래요. 내가 법적 근거 없이 무리한 보상을 요구했다는데, 내가 뭔 무리한 요구를 해요? 내 땅과 집이 필요하면 적어도 내가 살던 집만큼의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달라는 거예요. 그게 뭐가 잘못된 건데요. 이게 상식적이에요? 이게 정의로운 나라냐고요."
이삿짐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가던 종열씨는 결국 2021년 5월 11일, 다시 아현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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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열 씨의 투쟁 공간. 2021~2024년위에서부터 순서대로 기간 동안의 이종열 씨의 투쟁 공간이다. |
ⓒ 네이버 로드뷰 |
- 왜 다시 돌아오신 것 같으세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늙어도 사람답게 남은 인생을 잘 마무리하자는 거예요. 내가 편하고 내가 잘 먹고 잘 사려고 온 거지. 사실 죽으려면야 약이라도 먹고 죽을 수 있죠. 근데 할 게 있어. 그냥은 안 죽어."
- 할 게 뭔데요?
"저기 써 있잖아요.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데요."
- 싸움이요?
"그래. 그러면 이겨야죠. 여태까지 왜 싸웠어요. 불의와 싸운 거예요. 불의. 이 상황이 정당한 것이냐고. 불교에서 그래요.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고통의 바닷속에서 산다 이거야. 여기서 나 혼자 전기도 없고 물도 없지만 뭐 어때요. 심심하면 술 한 잔 먹고 노래도 부르고. 여기는 내 카페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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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열 씨 이종열 씨가 인터뷰 중이다. |
ⓒ 우혜림 |
- 가족 분들이 그립진 않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금 손주들이 9살, 8살, 5살이에요. 근데 보면 안 되는 게, 한 번 보면 자꾸 봐야 해.웃음"
종열씨는 지난해 4월 4일 아내와 이혼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2억 원 정도의 합의금을 송금했다. 최근에는 따로 보관해 둔 세간살이를 지인에게 부탁해 장애인 복지관 등에 기부했다. 틈이 나면 생각들을 정리해 공책에 기록한다던 종열씨는 요즘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
"이제 한계가 온 것 같아요. 요즘은 화가 나기보다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에요. 뭘요? 숨 쉬는 거. 숨 쉬는 걸 끝내려고. 나 스스로 계속 말해요. 이제 가자. 그만 가자. 근데 아직 미련이 남았나 봐. 전에는 드문드문 생각했거든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사실 그만두려면야 다 정리하고 어디 가서 혼자 살 수도 있죠. 근데 그럴 거였으면 진즉에 시작도 안 했지. 나는 이제 나와 싸워요. 그렇게 생각해요."
- 선생님 삶이 어떻게 기록되길 바라세요?
"그런 건 원하지 않아. 그냥 내가 태어난 곳에서 떠나면 돼. 그게 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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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열 씨가 공사장 가림막 외벽에 붙여둔 현수막. 어느 늙은 투쟁 아주 재미 있어요 왜?라고 적혀 있다. |
ⓒ 우혜림 |
오는 12월 4일이면 아현2구역 세입자였던 박준경씨의 6주기다. 그리고 그다음 달 1월 20일은 용산참사 15주기다. 수많은 저마다 고유한 죽음이 이 땅에 있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들인 삶에서 나오는 죽음을 주소서라고 노래하던 시인처럼, 의미 없는 삶이 아닌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그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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