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한국 망친 역적을 쐈다"…의거 후 첫 신문기록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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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안 의사는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의거 직후 러시아 영사관으로 압송돼 밀레르 검사가 신문했고, 이날 오후 10시쯤 안 의사의 신병과 취조 기록 원본을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으로 넘겼다. 당시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하얼빈 총영사도 안 의사의 총탄에 맞아 입원했기 때문에 잉커우 영사관에서 오노 모리에가 하얼빈으로 파견됐다. 오노는 10월 27일 오후 하얼빈 총영사관에 도착해 30일 뤼순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사가 와서 신문을 시작하기 전까지 안 의사를 먼저 신문했다. 원고는 이듬해인 1910년 3월 쓴 것으로,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안 의사를 최초로 신문한 오노 모리에가 쓴 친필 원고 일부.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묻자 안 의사가 “한국을 망친 역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대목이 보인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안중근 연구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미조부치 검사가 진행한 10월 30일 1차 신문은 자료가 남아 있는데 그 이전 오노의 취조는 처음 보는 내용”이라면서 “거사 직후인 27~29일의 공백을 메워주는 자료로 의미가 크다”고 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직전에 하얼빈역을 촬영한 사진. 오노 모리에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으로, 친필로 하얼빈 정거장 플랫폼조난 수분전이라고 썼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오노는 10월 27일 오후 하얼빈 총영사관에 도착했다. 그는 “하얼빈시 일대에 주범 안중근의 동료들이 잠복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이 들어 전원 일망타진으로 체포해야겠다는 생각하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안중근을 러시아 관헌에서 인계받아 총영사관 지하 구치실에 감금했다”고 적었다.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 -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토 히로부미점선가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는 모습. 오노 모리에가 소장했던 사진 7점 중 하나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오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연기를 내뱉으며,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통역을 통해 ‘당신은 담배를 피우는가?’라고 안에게 묻자 ‘매우 좋아한다’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고 적었다. 오노는 이후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래픽=양인성 오노 모리에 친필 회고록. 원고지 14장 중 첫 장으로,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이 보인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오노 모리에의 기록에는 하얼빈 총영사관의 내부 구조도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하얼빈 제국총영사관은 신시가지 고지대에 있으며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된 멋진 서양식 대가옥”이라고 썼다. “1층은 사무실과 영사관에 딸린 경찰서가 있고 2층은 총영사의 사택이며, 3층에는 관원과 경찰관들이 거주하고 있다”며 “지하 증기기관실에 있는 가마솥은 전투함의 엔진룸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였다”고 썼다.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은 현재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사진도 외관만 있어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의 구체적인 내부 환경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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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닷컴 바로가기] [ 조선일보 구독신청하기]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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