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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하다 들은 뜻밖의 말…택시 기사의 라스트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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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64회 작성일 24-02-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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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기사
[아무튼, 주말]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그날 밤 택시는 너무 느렸다
하차하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일러스트=김영석

일러스트=김영석

‘잘 들어가, 택시 번호 남기고.’ 친구의 문자에 핸드폰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먹고 방금 헤어진 지인들과 단톡방에서 이어지는 마무리 수다가 한참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늦은 시간에 혼자 택시를 탔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택시범죄보다 숨가쁘게 올라가는 택시미터 요금이 더 무섭다. 그냥 지하철 탈 걸 그랬나, 잠시 후회가 밀려 오지만 이미 늦었다. 그냥 그런 날이 있지 않나, 만사 귀찮은 날.

뭔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이 스친 건 택시를 타고 10여 분이 지나서였다. 남산아파트 인근에서 출발한 택시는 인적 끊긴 남산 소월길 커브길을 굽이굽이 오르고 있었다. 움직이는 택시 창을 프레임 삼아 저 아래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담긴다. 느릿느릿 꼬리를 물고 피곤하게 움직이는 자동차 브레이크등이 붉은 리본처럼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고, 수많은 김 대리들이 야근하는 고층빌딩 불빛이 별빛처럼 반짝인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가.

그 순간 깨달았다, 이상한 이유를. 창 밖의 풍경이 너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반대편 차로에서 다가오는 차도 없고, 옆 차로를 스치고 가는 차도 없었다. 밤늦은 시간에도 종종 보이던 나이트 러닝을 즐기는 동아리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음소거 버튼을 누른 텔레비전 브라운관처럼 숨막히도록 조용한 택시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나는 텅 빈 소월길을 시속 40km로 움직이는데,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소란스럽기만 하다. 운전을 하고는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는 뒷모습의 택시 기사, 그리고 덫에 걸린 쥐처럼 숨죽인 채 창 밖만 바라보는 중년의 여자. 우리는 마치 대도시의 고독과 절망, 외로움을 상징하는 에드워드 호퍼 그림의 주인공 같았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는 조심스럽게 척추를 하나하나 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부터 작은 움직임 하나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을 기사님이 느끼게 해선 안 된다. 어느새 호칭부터 달라졌다, 기사 아저씨에서 기사님으로. 택시를 타면서는 의식하지 못했던 사소한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의미를 담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택시는 새 차였다. 택시를 타면서 기억에 남아 있는 사진 같은 이미지 한 장이 떠오른다. 운전석 위에 ‘예약’ 등을 켜고 전기차 특유의 우우웅 저음 엔진소리로 천천히 다가오는 하얀색 차. 운전석에 앉은 기사님의 얼굴은 검은 사인펜으로 거칠게 덧칠한 것처럼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새 가죽시트에서 풍기는 묵직하게 매운 냄새를 깊게 들이 맡으며 기사님의 뒤통수를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영화 라스트 미션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라스트 미션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짧게 깎은 일명 ‘스포츠머리’ 스타일의 목과 귀 옆라인으로 흰 머리카락이 내려앉길 시작하는 걸 보니 50대 초반쯤 되었을까. 실내가 너무 어둑하여 옆모습의 윤곽도 희미하다. 며칠 새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추운 겨울밤이건만, 봄철 등산할 때 입는 얇은 바람막이 차림이다. 그래도 더운지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렸는데 구릿빛 팔에서 손등까지 이어지는 힘줄이 불끈 솟아올라 울퉁불퉁하다. 체격은 크지 않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중년의 남자. 몸싸움은 가망 없겠다. 다른 약점을 찾자.

택시는 여전히 아무도 없는 소월길을 시속 40km로 포복하듯 내려와 서울역 앞에서 독립문 쪽으로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다. 오른쪽으로 마치 구원의 빛처럼 남대문경찰서의 커다란 간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냥 여기에서 내려달라고 할까.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말해야 하는데. 이미 도착지를 정해서 택시를 불렀는데 중간에 내려달라고 하면 기분이 나빠져서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신호등은 초록색으로 바뀌고 다시 택시는 우우웅 전기 엔진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계기판은 여전히 시속 40km. 도대체 저 숫자의 의미는 뭐지. 약속된 사인일까. 택시 운전사의 ‘라스트 미션’일지 몰라. 90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은퇴를 선언하며 연출하고 주연으로 출연한 ‘라스트 미션’이라는 영화 속에서 그는 인생의 마지막 임무를 성실한 마약 운반책으로 산다. 뉴스마다 마약 밀반입 소식이 끊이질 않고, 라디오에서 마약 근절 캠페인 공익광고까지 나올 정도이니 영화 속 일만 같지 않다.

아마 어디선가 이 택시를 주시하는 마약 조직이 있을 거야, 택시기사를 위장한 마약 운반책이 틀림없어, 정말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이미 다른 길로 향하고 있을 텐데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잖아. 모든 신호를 다 걸려가며 아파트 앞에 도착하니 예상 도착 시간보다 정확히 두 배가 더 걸렸다. ‘자동결제죠?’ 라며 문을 열고 냅다 뛸 준비를 하는데 기사 아저씨의 느릿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잡는다.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오늘은 저도 운전하고 싶지 않았어요.” 택시 문을 닫지 못한 채 잠시 서 있었다. 오늘 밤 나의 귀갓길이 그의 ‘라스트 미션’이었길. ‘예약’ 등이 켜진 택시가 떠날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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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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