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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쓴 글을 2만~3만명이 볼 수 있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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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72회 작성일 24-02-2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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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4주년 기획] 아버지 삶을 보며 교사의 꿈을 품었던 나, 교사 시민기자가 되다

[안사을 기자]

2000년 2월 22일 창간한 <오마이뉴스> 가 올해로 창간 24주년을 맞았습니다. 부자지간이나 사제지간 또는 글 쓰는 활동을 통해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은 시민기자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아버지와 함께 전주 근교에 있는 모악산으로 나들이 같은 등산을 하게 되었다. 2024년 설 명절을 맞이하여 덕담 산행 정도를 제안하신 것이다. 문득 성인이 된 뒤로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산을 밟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마침 이번에 <오마이뉴스> 쪽에서 부자지간에 시민기자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써 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오늘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그 얘기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질문지를 몇 개 주었으니 그걸로 얘기하다 보면 뭐, 되지 않을까요?"
"그래. 어차피 우리가 평소에 하던 이야기도 있으니 잘 조합해서 써보면 되겠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시작
quot;교사가 쓴 글을 2만~3만명이 볼 수 있었던 이유는quot;
아버지 안준철 시민기자와 아들 안사을 시민기자.
ⓒ 안사을


아버지는 <오마이뉴스> 의 창간 시절 매우 활발하게 시민기자 활동을 하셨다. 첫 번째 기사를 찾아보니 2002년 2월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던 시절, 아버지는 다른 학교에서 참교육을 부르짖으며 온몸으로 학생을 만나고 계시던 교사였다. 그 시기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범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비교적 어릴 때부터 교사라는 명확한 꿈이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글에서나 삶에서나 교사로서의 삶이 진하게 배어 나오던 것을 어린 눈으로 매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직업을 갖고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흔들림 없고 진한 행복은 다름 아닌 보람에서 나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아버지는 <오마이뉴스> 창간 전부터 각종 매체에 교육 이야기를 종종 쓰고 계셨다. 내가 처음 접한 아버지의 글은 당신의 학생들에게 준 생일 축시와 해당 학생의 이야기를 연재 형식으로 엮은 책이었다.

"당시 진보 매체는 거의 오마이뉴스가 유일했지. 그리고 순천에 동부6군 사무실이 있었어. 아빠가 교단 일기를 써오고 있는 것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연재 기사 요청이 들어온 거야. 그때 시와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일주일에 두세 편씩 쓰기 시작했지."

[관련기사 : 안준철의 시와 아이들 https://omn.kr/1puii]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키우는 과정에서는 해당 연재 기사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단행본으로 엮이면서 초임 교사 생활의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나라는 한 소년이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데에 <오마이뉴스> 가 큰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제 첫 기사 역시 교육 이야기였어요. 음악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노래나 실기 말고, 모둠별로 음반 제작 활동을 하고 마무리로 발표까지 하는 수업이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어 하는 거예요. 이런 활동이 대중들에게도 알려지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아빠가 쓰시던 <오마이뉴스> 기사가 생각났죠.

무작정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아무런 자격이 필요 없더라고요. 마침 같은 시기에 우리 반 아이들과 자체적인 문학기행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 기사를 먼저 썼어요. 며칠 안 지나서 메인에 배치가 되고 원고료까지 나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수업 이야기, 학생 인권동아리 이야기 등을 써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오마이뉴스>


그러다가 여행과 사진에 빠지게 되면서 오히려 필름 사진 여행기에 집중하게 됐어요. 학교가 크다 보니 애잔한 학생, 버릇없는 학생, 훌륭한 아이 등등 쓰고 싶은 이야기들은 꽤 있었는데 개인정보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게 참 애매하더라고요."

"맞아. 아빠가 글을 썼던 시절에는 그런 부분에 지금처럼 민감하진 않았어.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 실명에서 가명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오히려 왜 자기 이름을 가명으로 썼냐면서 서운해 한 학생도 있었다니까."

"오히려 요즘에는 대안학교에 근무하면서 꼭 개인적인 이야기 말고도 다양한 수업과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어서 교육 기사 비중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학생 개인의 성장을 쓰려면 부정적인 측면도 드러낼 수밖에 없으니 기사로 쓰긴 힘들어요."


시민기자의 의미

교단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양면 수세미 같은 교사였다. 한쪽 면은 부드러운 스펀지를, 한쪽 면은 연마를 위한 딱딱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는 수세미 말이다.

인권 침해와 학교 폭력이 난무하던 그 옛날 야만스러운 교실에서 아버지는 3월 첫 만남, 아이들에게 체벌을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셨던 분이다. 그 이야기가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문화적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이 제법 많았던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30년이 넘게 계셨으니 해마다 반복되었던 전쟁과 평화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투쟁은 동지가 있었지만, 체벌 없는 교육에 대한 실천에서는 고독하셨던 것 같다. 매를 대지 않고 아이들을 다룬다는 것이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고 어리석은 행보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사을이 너의 교육적 실천은 학교나 교육과정 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잖아. 융합 수업을 한다든지 아이들과 여행 속에서 수업한다든지. 그런데 그때 아빠는 개인 단위의 개혁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마이뉴스> 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이 함께 아빠의 이야기를 봤지. 보통 2만 명에서 3만명이 보는데 그 정도면 엄청난 숫자라고 생각해. 아마 아빠와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만나던 다른 교사들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위로를 받았을 거야. 그런 보이지 않는 연대가 아빠에게도 큰 힘을 주었지." 오마이뉴스>


나에게도 <오마이뉴스> 의 지면은 참으로 소중하다. 보잘 것 없는 한 교사의 수기가 어떤 방식으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겠는가. 시민기자 중에 교육계에 몸 담은 분이 많은 것으로 안다. 얼굴을 맞대고 소통할 수는 없지만, 평화로운 방법으로 교육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많은 동료들이 서로의 글을 통해서 공감하고 용기를 얻는 기회를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

뿌듯한 순간이 있기도 하다. 3년 전 40명의 학생, 교사와 함께 삼척, 동해, 태백, 봉화를 누비며 8박 9일 동안 기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원래 해외로 떠나는 이동학습을 코로나19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국내로 바꾼 여정이었는데, 내가 잘 하는 야영 활동과 접목한 결과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교육 활동이었다.

그때 함께 갔던 교사들은 아직도 그곳에서의 에피소드를 들먹이며 배꼽 빠지게 웃는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종종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기행을 다녀온 후 필름에 담은 아이들의 여정을 <오마이뉴스> 에 그야말로 쏟아놓다시피 했다. 총 다섯 편으로 작성했고 내가 가장 아끼는 기사 목록이 되었다.
▲ 나의 기사 목록 아이들이 보여준 모습에 가슴이 끓어올라 저절로 글이 나왔더랬다.
ⓒ 안사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자신을 어느 대학교 교수라고 밝힌 그분은 긴히 부탁이 있다며 통화를 요청하였다. 초등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한 석사 과정 수업에서 내 기사를 인용해도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각종 자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일명 아웃도어 교육에 대해 의욕적으로 연구 중인데 마침 반가운 기사를 보고 연락처를 수소문했다고 하셨다.

몇 차례의 통화가 오고 갔고 내가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드리고자 노력했다. 벅찬 마음이 들었다. 일종의 취미 생활처럼 재미있게 하고 있는 시민기자 활동이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고, 힌트가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뿌듯했다. 내가 하는 교육 활동의 이면에 담긴 많은 생각과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사를 통해 동료가 알게 되는 상황 또한 많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교육 기사뿐 아니라 느린 방식으로 여행하는 필름 사진 여행기나, 누구나 독자이자 기자가 되는 사는 이야기에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따뜻한 격려를 느낀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주변의 것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민기자의 내일
▲ 아버지의 기사 목록 첫 페이지 최근 기사 목록은 아버지의 요즘 삶과도 닮아있다.
ⓒ 안사을


요즘 아버지의 글감은 타인의 교육에서 당신의 삶으로, 학생의 내면 대신 책과 자연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퇴직이었다.

정년퇴임까지 타 매체에 교단 일기를 쓰고 계셨는데 편집자에게 연재를 멈춰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현장에서 학생을 만날 수 없으니 소재가 없으므로 글을 쓸 수 없다고 하셨다. 너무도 명쾌한 이유와 선택에 오히려 담당자가 살짝 당황한 듯도 했다고.

대신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산책가라고 명명하고 주변을 걸으며 하루에 한 편 이상 시를 쓰신다. 매일 책을 읽고 간간이 서평을 작성하여 송고하는 것으로 시민기자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관련 기사 : 산책 길에서 시를 주웠습니다, 300여편이나 https://omn.kr/1wcro]

작금의 교육 현실이 안타까워 가끔 칼럼 형태의 글을 올리기도 한다.

"아빠는 이제 교사의 길에서 내려와 시인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 요즘 하는 것처럼 매일 시를 쓰고 책을 읽고, 서평을 써서 송고하는 방식으로 시민기자 활동을 이어가겠지. 오히려 네가 현장에 있으니 생생한 글을 쓸 수 있겠다."

"네. 저는 앞으로 쓰고 싶은 글들이 많아요. 우리 학교가 현재 큰 변혁을 앞두고 있거든요. 고교학점제... 우리는 입시 몰입교육을 지양하는 학교니까 진정한 의미의 고교학점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교육과정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교육 일기처럼 써보고 싶어요."


오늘은 학교에서 2024학년도 교육과정 중 문화예술 교과를 구성했다. 교사의 재능과 흥미에 따라 다양한 분야를 선정할 수 있다. 나는 음악을 전공한 교사지만 이번에는 아이들과 글짓기를 하기로 했다. 그냥 글이 아니라 보도글이다. 학생 시민기자를 양성하는 것을 수업의 목표로 삼았다.

우리 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삶의 이야기를 다뤄 볼 생각이다. 아름다운 장면도 있을 것이고 절절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마을 내에서 발생한 부당한 횡포나 갈등을 정의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 또한 다루어보고 싶다.

일주일에 한 시간 배정된 적은 시수이지만 마을 사람을 만나 직접 인터뷰도 해볼 것이다. 짤막한 보도자료부터 시작해서 기사글이 될 때까지 서로 글쓰기 연습을 할 것이다. 학교 신문에서 시작하여 마을 신문에 기사를 올리고, 더 나아가 풋풋한 청소년 시민기자의 생나무 글을 이곳에 올려보는 것으로 학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그리고 혹시나 저도 아이를 낳게 되면 꼭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싶거든요. 그때 온종일 아이와 함께하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육아일기로 작성해서 사는이야기로 내보내고 싶어요.

또 재밌는 상상을 해 봤는데, 아빠도 할아버지로서 아이를 돌보다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길 것 아녜요? 그럴 때 우리 둘이서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번갈아 가면서 각자의 육아일기를 송고하는 거예요. 아빠로서의 일기와 할아버지로서의 일기가 분명히 결이 다를 테니 분명 재미있을 거예요."


미리 받은 질문 중에 삼대 시민기자의 가능성에 대한 다소 익살스러운 내용이 있었다. 우리가 함께 써볼 육아일기의 주인공이 정말로 세상에 태어난다면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확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 아이는 자신이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갈 테니까. 글 쓰는 것을 좋아할 수도, 그림이나 숫자를 더 좋아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 또한 나에게 <오마이뉴스> 에 글을 써볼 것에 대해 권유조차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삶을 보고, 당신의 글을 읽고 자연스럽게 생긴 욕구였다. 만약 누군가 정해놓은 길이었다면 금세 심드렁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피붙이가 되었든 남으로 와서 제자가 되는 수많은 학생이 되었든, 그의 삶을 말로 성형해주기보다 내가 먼저 뜻깊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콘크리트 댐보다는 함께 흘러가는 물줄기가 되고 싶다.
▲ 모악산 정상에서 청명한 날씨. 구이저수지가 보인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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