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왜 집안일 사고뭉치 남편을 위로하지? 일잘러 아내는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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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부부가 둘 다 놀고 먹고 씁니다] 허술한 사람과 산다는 것 일러스트=김영석 두 집으로의 이사는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보령의 집은 40년 전 탄광 사택으로 지어진 공동주택이다. 오래된 집이라 당연히 손볼 게 많았다. 보령과 서울을 오가며 한 달 동안 도배, 장판, 칠을 하고 수납에 필요한 가구를 주문하고 넣느라 용산~대천 기차를 시내버스 타듯 이용했다. 1차, 보령으로의 이사는 수월한 편이었다. 이삿짐센터가 일을 잘했고 시간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2차, 성북동에서 성북동으로의 이사였다. 남은 짐을 성북동 작은 빌라로 옮기고 이어서 바로 새로운 거주자가 이사를 들어오는데 적지 않은 금액의 금융 거래와 자잘하지만 꼭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의 이름으로 가입한 전기와 수도, 가스 요금을 정산하고 나는 기타 등등 나머지 일들을 처리했다. 마지막까지 내 머리를 아프게 한 것은 정수기였다. 이사할 두 집 모두 정수기를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고민 끝에 일하며 물도 마셔야 하니 가장 마지막에 정수기를 제거하고 보령으로 가지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바로 이 정수기가 사고를 크게 쳤다. 엄밀하게는 남편이 정수기로 사고를 친 것이다. 내 남편 편성준씨는 읽고, 쓰고,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분리하는 것 말고는 딱히 잘 하는 게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못한다. 운전할 때 말을 시키면 다른 길로 들어서기 일쑤고 마음이 급하면 바지 지퍼를 올리지 않는 일도 흔하다. 오죽하면 남편의 첫 에세이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를 읽은 한 독자는 “책을 읽으며 작가가 걱정되기는 처음”이라며 남편의 허술함을 염려했다. 이런 남편과 살기에 이사와 관련하여 사람을 쓰고 시간을 조율하고 순서대로 진행해야 하거나 다소 까다로운 일은 내가 맡아서 처리했다. 그런데 정수기 처리도 그중 하나일 줄이야. 남편에게 정수기 선 자르는 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성북동 언덕 위에 있는 새 거처에서 청소와 정리를 하던 중 전화가 왔다. 남편은 다급했다. 정수기를 수도에서 분리하는 과정에서 선을 잘못 잘라서 물이 마구 쏟아져 수도를 잠갔다는 것이다. 아뿔싸! 이 일은 내가 했어야 했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남편에게 부탁한 일인데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남편이 사고를 친 것이다. 단지 가위질 한번 잘 못했을 뿐인데 큰 사고가 된 것이다. 남편은 “수도를 잠그고 내일 고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언덕 위에서 아래까지 한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이사 당일 물이 안 나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사태를 수습하고 나니 온몸의 기운이 빠졌다. 남편이 사고를 치면 나는 대체로 그 일을 수습한다. 사고를 친 남편은 불안해하고 당황한다. 나는 남편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일을 처리한다. 이런 모습을 보는 주위 사람들은 일을 낸 남편에게 더 많은 위로를 보낸다. 일을 수습하는 것은 언제나 나인데 말이다. 이날도 그랬다. 일을 돕겠다고 온 동네 친구는 남편이 많이 당황해 접촉 사고도 냈다며 남편을 걱정했다. 혈압도 높은 내가 얼굴이 벌게지도록 언덕을 뛰어 내려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일을 처리한 것인데 말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억울하다. 위기 대처 능력이 남편보다 좋아서 당황하는 대신 일을 처리할 뿐인데 말이다. 내가 남편에게 욱하며 소리를 질러서일까? 나도 다음부턴 앙~하고 울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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