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는 불, 앞은 50cm 회칼 든 살인마…좁은 고시원 복도는 지옥이 됐다
페이지 정보
본문
[한국의 미집행 사형수들]⑭정상진
서울 논현동 고시원의 방화 살인사건 피의자 정상진. /조선DB “이래야 저도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순간을 맞을 것 같습니다.” 월세 17만원짜리 1평 남짓한 고시원에 살며 홀로 일기장에 빨간 볼펜으로 이렇게 끄적여온 30대 실직 남성은 수년째 망설여온 ‘끔찍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글로는 ‘있는 자’와 맞서 싸우겠다고 적었지만, 정작 그가 삐뚤어진 적개심을 표출한 대상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고시원 옆방 이웃들이었다. 2008년 10월 20일, 그는 범행을 실행했다. 범행 장소는 자신이 살던 고시원이었다. 가로 2m, 세로 2m가 채 안 되는 쪽방이 건물 3~4층에 걸쳐 총 85개 붙어있었다. 그는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입주자들에게 50cm 흉기를 휘둘렀다. 1명밖에 지나가지 못하는 좁은 복도에 퇴로는 없었다. 경찰과 소방이 출동하기까지 30분간 지옥이 펼쳐졌다.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살인 사건’의 정상진범행 당시 30세은 그렇게 6명을 살해하고 7명을 다치게 했다. 고시원에 사는 이들은 취업준비생, 저임금 노동자들이었다. 피해자 13명은 인근 영동시장 ‘먹자골목’ 등 근처 식당에서 일했던 40~50대의 중년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아들 치료비를 벌던 중국동포 여성과, 학비를 벌며 가족 몰래 고시원에 살던 20대 여성이 희생자에 포함됐다. 정상진의 불우한 삶은 고시원 이웃을 무자비하게 살해할 핑계가 됐다. 정상진은 1978년 경남 합천군의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에서도 사랑받지 못했고, 학교에선 초·중·고 내내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다. 교사에게 맞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두 번이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인생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반판금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 냉장고 부품 생산라인에서 조립 및 용접 일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터지며 회사를 그만두곤 단란주점 종업원, 다단계회사 직원을 전전했다. 2002년 육군병장으로 제대한 후 그 길로 상경해 2003년부터 논현동의 고시원에서 살며 인근 시장의 음식점에서 배달원 등으로 일했다. 뚜렷한 직업이 없다 보니 늘 금전적으로 어려웠다. 그럼에도 인형뽑기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며 그나마 돈이 생기면 인형뽑기로 탕진했다. 실직 상태였던 그는 하루에 컵라면 한 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 궁핍했고, 때로는 누나에게 기대기도 했다. 민방위와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아 향군법 위반 등으로 벌금을 선고 받았지만 내지 않아 지명수배된 상태였다. 정상진의 범행 도구. /KBS 방송화면 캡처 범행 당일은 밀린 고시원비를 내기로 한 날이자 예비군 훈련 불참 벌금을 내지 않아 경찰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깨어있지만 아직 외출은 하지 않았을 오전 8시. 정상진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D고시원 3층 자신의 방 침대에 라이터 연료로 쓰는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아무도 그를 알아볼 수 없게 모자와 상하의, 신발을 모두 검정색으로 맞춰 입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앞을 볼 수 있게 고글과 마스크를 썼고, 눈앞을 밝힐 헤드랜턴도 꼈다. 허리춤에는 가스총을 차고 손에는 50cm 회칼을 들었다. 예비용 과도 2개는 바지 속 두 발목에 숨겨 찼다. 마치 특수부대원 같은 모습이었다. 8시 20분경 “불이야!”하는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쪽방들이 벌집처럼 붙어있던 고시원에 순식간에 뿌연 연기가 들어찬 탓이었다. 고시원의 출입문을 향하는 복도는 좁았다. 정상진은 그 길목에 섰다. 연기에 놀란 투숙자들이 복도로 뛰쳐나오기 시작했고, 정상진과 마주친 이들은 모두 범행 대상이 됐다. 복도로 달려 나온 중국동포 여성 A씨의 눈앞에 숨죽이고 타깃을 기다리고 있던 정상진이 서있었다. 그는 정상진의 첫번째 희생자가 됐다. 중국에 있는 아들 수술비 2000만원을 모으려고 한국에서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던 그였다. 가슴, 배 등 전신의 20∼30곳을 칼에 찔렸다. 저항 흔적이 손목과 다리에서 수없이 나타났는데, 한 번 저항한 뒤 달아났다가 쓰러진 상태에서 발로 다시 저항한 것으로 추정됐다. 불을 끄기 위해 소화기를 집어 든 취업 준비생 20대 남성 B씨도 무방비 상태로 칼을 맞았다. 80kg이 넘는 탄탄한 체격의 B씨가 붕 떠오를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배만 수 차례 찔린 B씨의 벌어진 상처에선 장기들이 쏟아져 나오려 했다. B씨는 배를 움켜쥔 채 “이제 죽는구나” 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린 B씨는 정상진의 얼굴을 가격한 뒤 도망쳐 총무실에 간신히 숨었다. B씨가 사력을 다해 막아 문을 여는 데 실패한 정상진이 곧 떠났고, B씨는 곧장 신고 전화를 했다. 구조되기까지 30여분간을 홀로 버틴 그는 사경을 헤매다 사건 엿새 만에 겨우 의식을 찾았다고 한다. 화재경보기가 울리자 4층으로 이동한 정상진은 40대 여성 C씨와 마주쳤다. 건강이 나빠져 가족에게 짐이 될까 고시원 생활을 하던 C씨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를 목격한 20대 여성 D씨가 놀라 자리에 주저앉자, 다음 타깃은 D씨가 됐다. D씨는 가족 몰래 고시원에서 살며 학비를 벌던 효녀였다. D씨 또래 아들이 있던 C씨는 목숨을 걸고 D씨를 지키려 정상진을 붙잡았다. 손목을 내리쳐도 C씨가 끝까지 붙잡고 있자 정상진은 C씨의 목을 찔렀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살해됐다. 정상진은 피해자들의 배를 집중적으로 찔렀고, 저항하면 닥치는대로 흉기를 휘둘렀다. 이렇게 여성만 5명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희생자들의 몸에서는 적어도 1인당 1∼7곳씩 상처가 발견됐다. 1명은 유독 가스와 열기를 피하려고 3층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가 장기손상으로 숨졌다. 논현동 고시원 방화현장, 현장검증 하는 정상진. /뉴시스 정상진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연기가 자욱하고 온갖 물건들이 나뒹굴며 온통 피 칠갑이 된 현장에서 수상한 남성 하나가 경찰의 눈에 띄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칼에 찔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정상진이 피해자인 척 소방관과 함께 4층을 빠져나오다 경찰에게 덜미를 잡혔다. 정상진은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경찰 조사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과거 회칼을 사서 살인을 준비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한때는 자살도 생각했다”며 “고시원비와 휴대전화 요금, 향군법 위반 벌금을 낼 돈도 없어 ‘이렇게 살면 뭐 하나’ 하는 생각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는 미지급 고시원 숙박료 17만원, 향군법 위반 벌금 150만원, 휴대전화 미납 요금 60만원, 개인 질병인 하지정맥류 수술비 300만원이 필요했지만, 범행 2개월 전인 2008년 8월부터 직업이 없어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정상진이 범행을 결심한 것은 4년 전인 2004년 2월경. 당시 서울 동대문구 황학동 중앙시장에서 흉기, 강남구 도곡동의 한 총포사에서 가스분사기, 고시원 인근 편의점에서 라이트용 기름 4통과 부탄가스 100여개를 각각 구입했다. 이어 2005∼2006년 사이에도 흉기를 샀고, 2009년 10월에는 논현동의 한 문구점에서 검은색 물안경을 사는 등 범행에 필요한 물건을 차례로 사들였다. 경찰 관계자는 “정 씨가 성장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무시를 당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진술했다”며 “이에 대한 응징으로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자 몇년 전부터 범행도구 등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범죄 영화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드러났다. 평소 공포 영화나 액션물을 좋아한 정상진은 2005년 영화 ‘달콤한 인생’을 보고 자신을 불행에 빠뜨린 이들에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정상진의 범행을 ‘묻지마 살인’으로 해석했다. 이웅혁 당시 경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자기조절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인한 화풀이성 범죄가 계속되고 있다”며 “이 같은 사람들을 진단하고 관리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막연히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졌던 정씨는 방화 후 피해자들의 동선까지 파악한 뒤 치밀한 계획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증상을 가진 경우로 보인다”며 “미국처럼 총기 소유가 가능했다면 총기 난사 사고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했다. 법원은 2009년 5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범행수단은 잔혹하고 무자비하며, 참혹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진지한 참회를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워 재범 위험성이 크고 교화의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 양형 기준을 아무리 엄격하게 적용하고 정씨에게 유리한 정상을 충분히 참작해도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다.” 정상진의 일기. /조선DB 현장에서는 정상진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쓴 일기장 4권도 발견됐다. 소방수에 젖은 채 비교적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일기장엔 검정과 빨강, 청색 볼펜으로 막연한 공상과 신변 비관, 범행 각오 등을 담은 내용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그냥 낳고 보자는 식이었지, 종자가 좋지 않으니 삶이 좋을 수 있겠느냐고”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잘못됐다. 몸과 두뇌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나 같은 태생은 결국 이렇게 끝난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런 가치가 없다” 등의 자책이 담겼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과 범행 각오도 드러났다. 내용은 이렇다. “조국은 나를 버렸다. 이젠 필사의 항쟁뿐이다. 내 마지막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피로써 싸워 이기리라. 나의 피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 있는 자는 잃을 게 많고 없는 자는 잃을 게 없다.” “이제야 저도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순간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멋지게 끝내자. 마지막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이 내게 두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난 복권 100억원 당첨보다 이 지구를 우주의 먼지로 폭파시켜 달라고 할 것.” 그렇다면 희생자의 유족과 겨우 살아남은 피해자의 삶은 어땠을까. 유족이 찾아간 A씨의 쪽방에는 찬 밥 반공기와 펼쳐 놓은 벼룩신문, 처음으로 제 돈 주고 사 본 4만원짜리 옷 두 벌이 남아 있었다. A씨 동생은 “엊그제 버스에서 언니를 만났는데 처음 비싼 옷 사 입었다고 자랑을 했다”며 애통해했다. A씨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A씨 아들은 어머니가 떠난 후에야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영정사진으로 어머니를 만났다. D씨의 오빠는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정상진의 얼굴을 공개하라는 청원을 올렸다. 일식집을 하던 D씨의 아버지는 가게 문을 닫았다. 딸을 해친 회칼을 다신 들 수 없어서였다. 술로 하루하루를 보낸 D씨의 아버지는 “딸이 죽은 날, 우리 가족도 죽었다”고 했다. B씨는 겨우 살아남았지만 수차례의 수술로 병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했다. 중장비기사 자격시험도 포기해야 했고 정서적 불안으로 가족과도 갈등이 생겨 결국 등을 돌렸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거다. 누가 온 몸에 칼을 맞고 밖으로 나온 자신의 내장을 본 경험을 하겠나. 이런 장면들이 꿈에 나오는 날에는 하루 종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조선닷컴 핫 뉴스 Best
[ 조선닷컴 바로가기] [ 조선일보 구독신청하기] 이혜진 기자 sunset@chosun.com |
관련링크
- 이전글"엄마 오해 풀어주세요"…남양주 역주행 사망사고, 원인 밝혀졌다 24.02.25
- 다음글안과 의사 연봉 최고 7억 vs 소아과 1억…이러니 필수의료 누가 하나 24.02.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