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 나타난 50대 아저씨, 우울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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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반 출신 수영 고수와 경쟁하다보니 사라진 고민
[최은영 기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싸움은 싸울 만한 사람이랑 해야 한다. 예를 들어 30살 차이 나는 사람과 진심으로 싸운다면 30살 많은 사람은 좀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부끄러운 일을 나는 요새 매우 열심히 한다. 중2 딸이랑 싸우느라 그렇다. 아이 중학교 익명 단톡방에 엄마 천 명이 모여있다. 여기 보면 나 같은 엄마가 많다. 눈에 보이면 싸우니 둘 중 하나는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자주 올라온다. 쟤가 어쩜 나한테 저럴 수 있지 싶어서 원망 퍼붓고 싶었던 그날, 톡방 가르침대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수영장으로 도망갔다. 내가 다니는 수영 강습반은 90프로가 70대 여자 회원이다. 중고등 6년 내내 체력장 최하위를 찍은 나도 여기선 1등이다. 가끔 동그란 몸매의 60대 남자 회원이 올 때도 있는데 나는 그 회원님도 거뜬히 따라잡는다. 그날은 50대 남자회원이 처음 왔다. 덩치는 있지만 군살 없는, 그 나이대 상위권일 몸매였다. 내가 선두, 그분이 2번에 섰는데 워밍업 자유형 때 그분 손이 내 발에 닿았다. 선두를 양보했다. 순식간에 반 바퀴 차이로 벌어졌다. 알고보니 옆동네 연수반 출신이다. 연수반은 수영 강습 최고 난이도이고 나는 아직 엄두도 못 낸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까 아이에게 퍼붓지 못한 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분노는 엉뚱하게도 연수반을 향한 경쟁심이 됐다. 내가 당신을 따라잡겠어라는 마음으로 팔을 젓고 발을 굴렀다. 내 뒤 3번 회원님과 반 바퀴 차이를 벌렸지만 몸 좋은 회원님과의 차이도 여전히 반 바퀴였다. 나보다 30살 어린 아이와 진심으로 싸우다 보면 내 수준이 한심해서 우울해진다. 그 우울이 수영장 물에 빠르게 녹았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맞는가 보다. 싸우고 수영장으로 도망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녹은 적은 처음이었다. 정확하게는 맥박이 분신술을 쓰는지 모든 근육에서 각각 풀무질을 해대는 통에 녹든 말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중2 딸과의 다툼 피해 수영장으로... 의외의 효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크게 두 부류다. 통제 가능한 일과 통제 불가능한 일이다. 사춘기 호르몬 분출은 통제 불가능이다. 평소보다 수영 속도를 올려보거나 강습 끝나고 두 바퀴 더 돌겠다는 계획은 통제 가능이다. 통제 불가능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면 남는 건 스트레스밖에 없다. 반면 통제 가능한 일을 하나씩 해결하면 안정감이 생긴다. 그 안정감은 통제 불가능한 문제에 매몰된 나에게서 빠져나오는 마중물이 된다. 해결되는 과정에서 자아효능감이 높아져서 그렇다. 끝날 때까지 그 남자를 따라잡지 못했다. 예상했던 터라 타격은 없었다. 대신 강습 이래 최대치 운동 신기록을 세웠다. 강습 후에 자유형 다섯 바퀴를 더 돌았다. 두 바퀴 계획했다가 다섯 바퀴 하니 그게 뭐라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강습 끝나고 카페에 좀 앉아있다가 최대한 늦게 들어갈 계획이었다. 본의 아니게 내 한계치를 찍는 수영을 하고 보니 아이에게 서운한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눕지 않으면 내 몸이 내게 서운해할 지경이었다. 집으로 바로 갔다. 아이는 핸드폰에 코를 박고 킬킬대고 있었다. 다른 날이었으면 엄마한테 그렇게 해놓고 폰질 할 마음이 들어?라고 쏘아붙였을지 모르겠다. 그날은 힘들어서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내 힘을 매일 빼면 이 싸움이 끝날까. 엄마 카드 훔쳐서 하루에 몇 십만 원을 긁은 애도 있다는데, 도서관 간대놓고 달리는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신나게 소리지르는 애도 있다는데, 내 눈 앞에서 핸드폰 보는 게 뭐 그리 큰 일인가 싶었다. 무거워진 팔다리가 가벼운 머리를 만들고 가벼워진 머리는 너그러운 시선을 만든다. 사춘기 아이랑 싸워 이긴다 한들, 딱히 바뀔 게 없다. 애는 다음 날 되면 똑같은 행동을 할테니 말이다. 만일 사춘기가 그날 싸움 한 방에 딱 끝난다면 어떻게든 이겨야겠지만 이건 그냥 시간이 지나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 내린 결론이 놀라웠다. 애 엄마가 몸 좋은 아저씨 덕을 이렇게 본다. 연수반 회원님이 자주 오셔서 폭발하는 나를 탈탈 털어버렸으면 좋겠다. 굳이 몸이 이렇게 힘들어야 너그러워지는 건가 싶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며 위로한다. 수영 앞뒤로 스트레칭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아이 사춘기를 보내며 만년 체력장 꼴찌는 태릉인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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