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서듯 팔 들고 6시간…까마득한 벽이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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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늘어나는 여성 도배사 직접 체험해보니 조유미 기자가 사다리 발판일명 ‘우마’ 위에 올라 천장에 도배지를 붙이고 솔질을 하는 모습.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경위는 이렇다. 회의가 끝나고 모인 저녁 자리. 부장이 스치듯 “요즘 젊은 친구들 도배 많이 한다는데, 체험 한번 해보라”고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부서에 온 지 2주 된 새싹 부원.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반드시 도배를 ‘해내겠다’고 다짐했다. 이튿날 확인하니 도배 기능사 자격증에 응시하는 여성은 2021년 1191명, 2022년 1492명, 지난해 1952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 ‘도대체, 왜?’ 현장에서 이유를 찾을 차례다. “기능사 자격증 없으면 힘들어요.” 거절이 이어지다, 문의한 곳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도배 명장名匠이 계신데, 일단 ‘일일 조수’로 써 보겠다고 하네요.” ◇사다리 위의 사시나무 “엄청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그냥 하는 척만 해요.” 경기도 하남시의 한 28층 아파트. 12년 차 도배사 정필웍52씨가 ‘믹스 커피’를 마시다 말고 걱정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날 ‘헌 집을 새집처럼’ 단장해 줄, 도배 팀원 6명 중 한 명이었다. 마감 기한이 넉넉한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이 아닌 이상, 도배사는 빠른 작업을 위해 통상 평수에 따라 팀을 꾸려 일한다. 20평대 4명, 30평대 5~6명, 40평대 7~8명, 50평대 이상은 10~11명. 미리 양해를 구해둔 집주인 고예진34씨도 “괜찮겠느냐”고 나를 걱정한다. ‘하는 척만 해선’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고생을 해야 쓸 거리가 생긴다”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수록 좋다”…. 구구절절 설명을 마치고 “제가 도움이 좀 될까요?” 물었다. 잠시 일동 침묵. 나는 들었다. 악몽처럼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열정은 좋은데… 상당히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오전 9시, 작업이 시작됐다. ‘첫 임무’가 떨어졌다. 흰색 물풀처럼 생긴 접착 증강제프라이머를 벽면의 나무 패널에 붓으로 바르는 작업이었다. 벽지가 잘 달라붙지 않는 맨들맨들한 벽면에 코팅을 해서, 도배지 접착이 잘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높이 약 50㎝, 길이 약 250㎝짜리 일자 모양 사다리 발판일명 ‘우마’ 위에 올라섰다. 한 손에 증강제가 든 플라스틱 통을, 다른 손에 붓을 들고 중심을 잡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붓질을 했다. 통에 든 묵직한 증강제 무게 때문에 몇 분 지나지 않아 팔도 떨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누군가 한마디 한다. “거 사시나무여, 뭐여?” ◇풀 발린 종이와의 사투 ‘붙였다’ 싶으면 훌렁 떨어지고, ‘분명 붙였다’ 싶었는데 또 떨어진다. “한번 붙여 보라”는 말에 당차게 나섰건만, 풀 발린 초배지初褙紙 한 장을 천장에 붙이는 데 꼬박 10여 분이 걸렸다. 10여 분간 꼬박 고개와 손을 들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배하다 팔 떨어진 사람 정말 없나요’ 묻고 싶은 심정. 정식으로 도배를 하기 전, 얇은 종이로 애벌 도배하는 걸 ‘초배’라 부른다. 이때 쓰는 한지 같은 재질의 종이가 초배지다. 사람으로 따지면 ‘속옷’이다. 그래픽=송윤혜 40여 년 경력의 도배사 신호현64씨가 “잘 보라”며 초배지 위로 솔을 ‘갈 지之’ 자로 가볍게 움직인다. 초배지가 제자리를 찾은 듯 단번에 붙었다. 10초 걸렸다. 그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대한민국 명장 실내 건축 분야에 2015년 이름을 올렸다. ‘최고의 숙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솔질을 얼마나 적게, 효율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실력이 결정된다”며 “초보자 때는 힘으로 붙이는데 그럼 힘들어서 오래 못 한다”고 설명했다. 요령이 없으면 힘으로라도 붙여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없었다. 전형적인 근력 ‘제로’ 운동 부족 현대인. ‘꿀팁’이라며 배운 방법은 이랬다. 우선 허리를 ‘C’ 자로 만들어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양손으로 도배지를 받쳐 든 뒤 모서리 부분부터 붙인다. 그리고 한 손으로 붙인 부분에 붓질을 하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다른 손으로는 남은 부분을 붙인다. ‘이러니까 이번엔 허리가 아픈데요’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처음 체험해본 도배는 종일 벽을 마주하며 벌을 서는 것과 같았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달콤한 휴식 시간. 김치찌개로 점심 식사를 마친 팀원들이 믹스 커피를 나눠 마셨다. 42.195km 마라톤을 뛰기 전 몸풀기 하는 느낌이라고. ‘요즘 도배 배우려는 젊은 여성이 많다는데 진짜인지’ 물었다. 20년 차 도배사 문영숙57씨가 “느는 건 맞는데 학원에 10명 등록하면 살아남는 사람은 2명 남짓”이라며 “배울 때부터 몸살이 나고 팔이 아프니 여자고 남자고 적응 자체가 어렵다”고 했다. 오후에 다시 벌을 섰다. 도배 4시간째. 하다 보니 뜻밖의 적성을 찾은 것 같다. 정식 도배지를 붙이는 정배正褙 작업을 하면서였다. 초배와 달리 정배는 각각의 도배지가 맞붙은 이음새 부분을 ‘롤러’로 밀어, 최대한 틈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롤러질을 하다 보면 빈틈으로 도배 풀이 밀려나오고 풀과 이음새가 뭉개지며 붙는다. 역시나 팔은 빠질 것 같다. 요령 없이 문지르니 오히려 벽지가 홍해처럼 갈라진다. 다시 롤러에 힘을 줘 벌어진 틈을 붙여본다. 튀어나온 부분은 양옆으로 밀어서 곱게 편다. 틈 하나 메우는 데 1시간 걸린 것 같다. 벽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이 작업을 어느 세월에 다 하나. “일꾼 하나 늘었네.” 그때 누군가 무심하게 말했다. 쾌감이 밀려왔다. 반나절 만에 들은, 첫 칭찬으로 추정이었다. 이때부터 롤러질만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다리에서 내려와 내가 씨름한 천장과 벽을 마주하고 섰다. 틈은 어느새 사라지고 온통 새하얗다. 배윤슬31씨였나, 최근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청년 도배사’로 화제가 된 이가 있다. 목조 주택의 매력에 빠져 10대 때부터 목수로 일해 온 유튜버 이아진22씨도 있다. 어쩌면 도배와 집을 짓는 일의 공통점은 고된 작업 끝에 자신의 하루 성과가 작품作品처럼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 아닐까. 주변에선 도배지 펄럭이는 소리만 들린다. 생각해 보니 도배사 선배들은 ‘왕초보’인 날 가르칠 때만 입을 열었다. 소통은 ‘도배용 솔’로 했다. 솔로 벽을 한 번 치면 ‘나 작업 끝냈다’, 두 번 치면 ‘속도 높여라’, 세 번 치면 ‘다시 시작하겠다’이다. ‘막내 팀원’인 6년 차 홍모38씨가 “이렇게 자기가 맡은 일만 묵묵히 하면 되니 직장 생활 스트레스가 적은 것도 도배의 매력”이라고 했다. 수입도 괜찮다. 처음 시작하고 ‘반장님’ 밑에서 일할 땐 일당 7만~8만원 수준이지만 2년 차쯤 되면 17만~18만원, 경력 5년 이상은 실력에 따라 25만원 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익숙해지면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몇 동이나 몇 가구를 오롯이 혼자 맡아 일할 수 있다. 일명 ‘동띠기’ 작업. 보수는 벽과 천장을 나눠 평당으로 받는다. 그야말로 ‘일한 만큼’ 벌어가는 셈이다. 대신 천장과 벽 치수 재기를 혼자 해야 하는 만큼 책임도 본인 몫이다. 장장 6시간의 도배 작업이 마무리돼 간다. 더 이상 도울 일이 없을 것 같아 인사를 하고 나왔다. 명장이 농담조로 외쳤다. “오늘 일당은 계좌로 쏴 드릴게!” 글쎄, 죄스럽지만 내가 붙인 도배지는 선배들이 한 번 더 작업했다. 제가 돈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일일 조수가 붙인 도배지는 선배들이 한 번 더 작업했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뭐지, 이 뒷목에 ‘퍽치기’당한 것 같은 욱신거림은. ‘아, 나 어제 도배했지.’ 다음 날,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으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혹자는 팔이 아프다는데, 난 목과 어깨가 더 아팠다. 아마 꼬박 몇 시간을 천장 쳐다보며 했던 롤러 작업 때문이리라. 고작 하루 체험하고 ‘도배를 알겠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튿날 찾아오는 통증이 ‘넌 어제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어’라며 오히려 나를 독려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몸 쓰는 일을 택한’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됐다. ‘어제 취재 열심히 했구나’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난 휴가 때 일본에서 사 온 동전 파스가 눈에 들어온다. ‘저거 붙여야지’라고 생각하다 침대에서 그냥 뻗었다. 고칠 것투성이라 부장을 애먹이는 내 기사도 언젠가 롤러질 끝에 티 하나 없이 매끈해진 갓 바른 벽지처럼 되길 바라며, 아무 말도 건네지 않던 그날의 그 벽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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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닷컴 바로가기] [ 조선일보 구독신청하기] 조유미 기자 youandm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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