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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항아리 값으로 천경자가 건넸다…40년간 창고에 갇혔던 꽃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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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집기 작성일 24-01-01 08:05 조회 2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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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천경자 화백이 그린 ‘꽃과 항아리’의 가운데 세부 모습. 여름에 피는 카라 꽃과 가을에 만발하는 국화꽃들이 군청색의 어두운 화면을 배경으로 서로 섞인 채 자태를 드러냈다.


살까? 말까? 40대 화가 천경자는 계속 머뭇거렸다.



도자기와 서화들이 빼곡히 들어찬 골동품 가게의 진열장 앞에서 눈을 반짝이는 그이의 눈 앞에 막 매물로 나온 멋드러진 물건 두 개가 놓여있었다. 괴목으로 만든 듬직한 강화반닫이와 하얗고 소담스러운 조선 백자항아리였다.



“두 작품이 매혹적이긴 한데…제가 며칠 뒤 아프리카 기행을 떠나야 해서 경비를 모아두느라 지금 수중에 돈이 별로 없어요.”



천경자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얼굴이 불콰한 화가 권옥연이 재촉하듯 말했다.



“현금 안 줘도 돼. 새로 그린 그림을 주면 되잖아. 나도 그렇고 후배 김종학도 그렇고, 다 그림 주고 골동품 입수하는 걸? ”



“김군, 그래도 돼요? 그러면 저 반닫이와 백자항아리 제 작업실로 올려주세요. 저도 그림을 보내드릴게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3년 4월, 서울 인사동 사거리 위쪽의 골동품 점 통인가게에서는 색다른 인연을 낳은 예술품 거래가 이뤄졌다. 1924년 통인가게를 창업한 부친 김정환으로부터 막 가업을 물려받은 스물세살 청년 주인 김완규는 흐뭇한 표정으로 가게에 막 나온 강화반닫이와 백자항아리를 마흔아홉살의 멋쟁이 화가 천경자에게 처음 팔게 된다. 천경자는 채색화의 일가를 이룬 대가였지만, 도자기나 고가구 등 옛 공예품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다. 통인가게의 만년 단골이자 막역한 이성 친구로 함께 인사동과 명동 일대를 돌아다녔던 권옥연이 살 물건의 용도까지 일러주면서 적극 수집을 권한 덕분에 골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셈이었다. 이제 일흔을 넘긴 통인가게 주인이자 통인그룹 회장인 김완규씨는 지난 23일 인사동 사무실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두 분다 옷을 잘 입고 패션감각이 뛰어난 멋쟁이들이었어요. 권옥연 선생은 항상 상의 주머니에 소주나 양주병을 끼고 저희 가게에 와서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골동품들을 고르곤 했는데, 천경자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그날도 마침 백자와 반닫이 좋은 게 막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인데 데꺽 천 선생한테 그렇게 가게 된 것이지요. 당장 구루마리어카를 모는 인부 윤씨를 불러 끙끙거리며 육중한 무게의 반닫이와 백자 항아리를 싣고 옥인동에 있던 천 작가의 작업실로 보냈지요. 천 작가도 돌아오는 편에 대금으로 작품을 보냈어요. 그게 바로 저 그림입니다.”



김 회장이 가리킨 그림은 통인화랑 건물 6층 꼭대기에 있는 사무실 ‘상광루’의 집무 책상 뒤켠에 걸려있는 천경자의 1972년작 ‘꽃과 항아리’다. 색조가 균일하지 않은 군청색 화선지 화폭에 갈색빛이 감도는 화병이 있고 그 위에 다채로운 종류의 꽃들이 가득 꽂혀있는 정물화다. 세로 77cm, 가로 55cm 크기의 15호 짜리 그림으로 은은한 분위기를 내는 석채 안료로 그렸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쓴 ‘一九七二 鏡子’일구칠이 경자란 전형적인 1970년대식 한자이름 서명이 쓰여져 있다.



‘꽃과 항아리’ 그림 오른쪽 아래에 쓴 천 화백의 서명. 70년대초반 그림에 들어간 전형적인 한자이름 서명글씨다.


화려하고 강렬한 양광을 선호하는 천경자의 중기, 말년작들의 화풍과 비교하면 이 작품의 화풍은 파격적이고 색달라서 보는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짙고 어두운 바탕색에 봄과 여름, 가을에 서로 철을 달리해 피는 다기한 꽃의 모양과 색들이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화면을 빛낸다. 한가운데는 열대지방에서 피는 여름의 꽃 흰 카라 두 송이가 넓은 꽃잎판을 벌리면서 피어있고, 그 왼편으로 봄꽃인 허연 배꽃과 자목련이, 오른편에는 대칭을 이루듯 가을꽃인 희고 붉고 노란 국화 꽃송이들이 소담한 정취를 피워올리고 있다.



천 화백의 1972년작 ‘꽃과 항아리’.


1950~60년대 강렬한 생태적 풍경이나 꿈결 같은 분위기의 인물화와 정물화의 세계를 탐구했던 천경자는 1969년부터 세계 각지로 사생 여행을 다니면서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느낌이 강해진다. 해방 전 일본유학시절부터 능숙했던 채색화를 양화에 좀더 근접하게 묘사나 색감 등을 조절하면서 기존 배색에 안료를 섞지 않고 물만 붓질해 농도를 투명하게 하고 화면을 정제하는 특유의 물바림 기법으로 좀 더 현대적인 감각을 구사한다. 화가가 골동품 대금으로 준 ‘꽃과 항아리’는 바로 이런 1970년대 초반 이뤄진 천경자 화풍의 새로운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는 그뒤 팔아볼 요량으로 1년간 한옥이었던 가게 계단 쪽 벽에 상설전 하듯 작품을 설치했다. 그러나 작품은 팔리지 않았고, 그는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가게 창고로 그림을 옮겨두고 40년 넘게 보관했다. 그러다 천경자 사후에 우연히 창고를 정리하다 그림의 액자 상태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발견하고 천경자의 생전 수제자였던 이화자 작가에게 2021년 5월 액자 수리를 의뢰했다. 스승의 그림을 처음 실견한 이 작가는 시종 숙연한 표정으로 액자의 원래 상태를 말끔히 복원한 뒤 일체의 비용도 받지 않고 다음과 같은 소견서를 썼다.



“위 작품은 채색화의 대표적인 화가 천경자 선생님의 1972년 작품으로서, 서양화와 다르게 양감을 반대로 표현하는 등 한국화의 대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계절의 꽃들이 어우러져 있는 작가 특유의 화풍을 볼 수 있으며, 선생님이 중요하게 가르치신 표현 기법이 그대로 곳곳에 잘 나타나 있는 작품입니다. 천 선생님 액자를 수리하여 제자로서 선생님과의 그 시절을 기리고 소중한 천 선생님의 작품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자 합니다.”



지난 2021년 5월 천 화백의 수제자였던 이화자 작가가 스승의 작품인 ‘꽃과 항아리’의 액자를 수리하고 있는 모습. 통인가게 제공


이 소견서를 보고 마음이 동한 김 회장은 자신의 6층 집무실에 이 그림을 걸어두게 된다. 뒤이어 그해 10월 김 회장의 지인으로 우연히 집무실에서 그림을 본 미술사가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도 화격에 감동해 역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감식안을 정성껏 담은 감평 글을 자신의 인장을 찍고 써주었다. 그는 이 감평 글에서 “한 화병에 사계절을 담은 점이나, 외래종인 흰 카라와 여러 색의 우리 꽃을 어울려 낸 아이디어에는 천경자다운 파격의 해석이 돋보인다.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표구나 액자도 1972년 꾸밈이 그대로 유지돼 우리 20세기 미술재료의 역사를 엿보게 해준다”고 적었다.



통인가게는 내년 창업 100돌을 맞는다. 골동품가게를 넘어 미술품 운송과 서류보관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가업을 중흥시킨 김 회장은 100돌을 맞아 자신과 여러 후학들의 아름다운 인연이 엮인 천경자의 숨은 명작을 공공미술관에 소장한 천경자의 다른 정물그림들과 엮어 소박한 작품집을 만들겠다는 소망을 털어놓았다. 새해 그의 꿈이 무난히 이뤄질 수 있을까.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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